그래그 대사를 통하여 본 박정희

2011.05.12 04: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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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널드 그레그, 박정희 정권을 말하다

도널드 그레그 전 주한미국 대사는 대사로 부임(재임 1989~1993년)하기 앞서 1970년대 유신 정권 초기 미 중앙정보국 한국지부 총책임자로 있으며 박정희 정권을 상대적으로 깊숙히 지켜볼 수 있었던 인물 중 하나다.

그레그 전 대사는 박정희 정권에 대해 “경제발전이라는 ‘빛’과 독재라는 ‘그림자’를 동시에 지닌 인물”이라고 평가했다. 그는 박 전 대통령의 독재정치에 대해 강하게 비판하면서도, 그가 이룩한 경제발전에 대해서는 높이 평가했다. 그는 또 박 전 대통령이 1972년 핵무기 개발을 시도했으나, 미국의 강한 반대로 몇 년 뒤 이를 포기했다고 이야기했다.

이달초 뉴욕주 아몽크에 있는 자택을 찾아 그레그를 인터뷰했다. 

■ 1961년 쿠데타

- 쿠데타 이야기부터 시작하자. 1961년 5월 이전에 미국은 한국 군부의 쿠데타 정보를 미리 파악하거나 쿠데타 가능성을 염두에 두진 않았었나? 그 가능성을 감지하지 못했나?





“몰랐다. 당시 나는 일본에 있었고, 한국은 장면 정부였다. 미국은 장면 정부가 들어섰을 때, 한국이 민주주의를 향해 움직이고 있다는 점에서 상당한 기대를 했다. 그러나 그는 정치상황을 제대로 다루지 못했다. 그래서 나는 박정희가 쿠데타를 일으켰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그렇게 많이 놀라진 않았다. 박정희의 등장에 대해 우린(미국은) 판단을 내리기 복잡한 상태였다. 그는 일본의 군사훈련을 받았고, 또 한때 좌익이었다. 그래서 그가 어떤 인물인지 매우 혼란스러웠다. 그러나 그가 매우 강력한 지도자이고, 한국의 경제발전에 대한 비전을 갖고 있다는 것을 금방 알게 됐다. 그러나 그와 동시에 그가 독재자라는 것도 알았다.”

- 박정희는 쿠데타를 일으킨 명분으로, 당시 사회가 혼란스러워 북한의 공격으로부터 취약하다는 것을 이유로 들었다. 당시 미국의 평가는 어떠했나? 당시 한국사회는 안정으로 가기 힘들었나?

“한반도 분단은 미국 때문이다. 한국민들에게 죄송하게 생각한다. 북한은 1950년대에 남한보다 국력이 훨씬 강했다. 군사적으로, 경제적으로 모두. 1960년대에 북한의 침략에 대한 남한의 공포는 매우 컸다. 또 당시 김일성은 북한에서 매우 강력한 지도자였고, 소련의 강력한 지지를 받고 있었다. 당시 남한의 장면 정부는 매우 진보적이었지만, 강력하지 않았다. 북한이 이를 틈타 공격한다면, 남한은 무너졌을 것이다. 나는 그것이 박정희의 쿠데타 동기 중 하나가 됐다고 본다.”

- 미국은 5·16 쿠데타에 대해 아무런 제어도 하지 않았다. 박 정권이 친미반공 정권이 될 것으로 보고, 이를 묵인한 것 아닌가?

“(쿠데타 당시) 미 정부 안에서 두가지 반응이 있었다고 생각한다. 하나는 장면 정부가 (1960년 정권교체 이후) 효과적으로 대처하지 못한 점에 대한 실망감, 그리고 국방성을 중심으로 박정희가 반공 군부 지도자라는 점에서 북한으로부터의 공격에 효과적으로 대처할 수 있다는 기대감이 있었다고 본다.”

- 당시 케네디 대통령의 (쿠데타에 대한) 견해는 무엇이었을까?

“당시 케네디의 관심은 온통 (1961년 4월17일 벌어진) 미국의 쿠바 피그만 침공 실패에 집중돼 있었다. 이어 1962년에는 쿠바 미사일 위기가 닥친다. 그는 아마 한국에 관심을 기울일 여유가 없었을 것이다.”

- 그러면 당시 한국 상황에 대한 미국 행정부내의 반응은 무엇이었나?

“당시 미국의 일반적인 반응은 박정희는 반공주의자인 장군이고, (어쨌든) 그가 정권을 장악한 건 사실이다. 미국은 이를 반대하진 않겠다는 정도였을 것이다.”

- 미국이 박정희를 좋아했다는 뜻인가?

“좋아했다기보단, 받아들였다고 봐야할 것이다. 당시 미국의 외교정책은 냉전의 관점에서 해당 국가의 국내정책을 바라봤다. 정부의 방향이 공산주의냐, 반공이냐 하는 게 가장 중요했다. 어떤 나라에서 누군가가 정권을 장악했다고 할 때, (그 정부가 반공주의 정부라면) 오케이다. 한국의 경우, 당시 장면 정부는 강력하지 않았고, 매우 강력한 반공주의자에 의해 정권이 교체됐다. 미국이 새 지도자와 싸울 필요가 없다. 그가 경제를 발전시킬 수 있도록 돕자는 게 당시 미국의 결정이라고 봐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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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신정권 도래

- 1973년 이전에 한국에 온 적이 있나?

“1968년에 한국을 처음 방문했을 때, 온나라가 경제발전을 시작하면서 에너지에 차 있는 것을 보고 깊은 인상을 받았다. 그래서 그때 나는 미 중앙정보국(CIA)에 한국 발령을 요청했고, 1973년 미 중앙정보국 한국지부 총책임자로 한국에 왔다.”

- 1968년과 1973년의 경제상황은 많이 달랐을텐데….

“완전히 달랐다. 당시 한국에는 박태준, 남덕우, 정주영, 이병철 등 공공·민간 부문 양쪽에 매우 뛰어난 이들이 있었다.”

- 비판론자들은 박정희가 장기독재 체제인 유신정권을 수립하면서 1970년대에 더욱 경제발전에 가속도를 냈다. 이는 유신에 대한 정당화를 위한 수단이었다는 지적도 있다.

“그렇다. 그것이 박정희가 지닌 양면성이다. 박정희의 한쪽 면이 박태준, 남덕우, 정주영, 이병철이라면, 또다른 한쪽 면이 이후락, 박동선 등이다. 빛과 그림자다. 내가 1973년에 한국에 왔을 때, 당시 주한미대사인 필립 하비브는 내게 이렇게 말했다. ‘한 가지 규칙만 지켜라. 절대 박동선을 만나지 말고, 그와 어떤 일도 하지 마라’는 것이다. (로비스트인) 박동선이 미국 관리들에게 접근해 로비를 벌이는 것을 염려했기 때문이다.”

- 이후락(중앙정보부장)은 어떠했나?

“내가 처음 이후락 부장을 만나러 가보니, 주한미대사관 맞은 편에 있는 그의 사무실은 빌딩의 맨 꼭대기층 한 층 전부였다. 엄청나게 넓었다. 아마 청와대 대통령 집무실보다 훨씬 넓었을 것이다. 내가 들어서자 옆에서 사진을 찍었고, 5~6명의 참모들이 배석했다. 마치 국가원수와 접견하는 듯했다. 나는 그를 좋아하지 않았다. 당시 나는 한국의 중앙정보부가 매우 위험한 조직이라고 생각했다. 당시 중정의 관심은 국내정치에 치중했고, 그것도 정권에 대한 반대를 억누르는데 집중했다. 정보기관의 주임무는 정보(fact)를 파악하는 것이라는 내 생각과 많이 달랐다.

(1972년 5월 평양을 다녀온) 이후락에게 평양에 가서 김일성을 만난 소감을 물어보았다. 그때 그는 “(김일성은) 매우 강한 인물이다”라는 말만 반복했다. 나는 그때 이후락이 ‘총을 꺼내서 그를 쏘고 싶었다’고 말할 줄 알았다. 그러나 정반대였다. 그 이후 나는 (1972년 10월) 유신의 뿌리가 이후락의 북한에 대한 해석에도 닿아있지 않나 하는 생각을 하곤 했다. 아마 이후락은 박정희에게 ‘우리가 그들과 대화를 하려면, 북한의 김일성처럼 우리도 그만큼 강력한 지도력을 가져야 한다’고 말했을 지 모른다.”

- 결국 남북한의 양쪽 지도자가 모두 남북대화를 자신들의 독재 강화에 이용한 것인가?

“그렇다. 박 정권이 이후락을 평양으로 보낸 데에는 남북한의 점진적 평화 가능성에 대한 판단을 하려는 것과 함께 김일성에 대한 평가를 내리려는 약삭빠른 의도가 있었던 것으로 본다.”

“이후락의 김일성 면담이 유신 낳았을수도”

이후락은 1972년 5월 평양을 다녀온 뒤 `김일성은 매우 강한 인물’이란 말을 반복했다. 그가 박정희에게 ‘우리도 강력한 지도력을 가져야 한다’고 말했을지 모른다.

■ 김대중 납치와 최종길 교수 고문치사

- 당신은 김대중 전 대통령을 (박정희와 전두환으로부터) 두 번이나 구한 인물로 유명하다. 1973년 김대중 납치 당시를 설명해달라.

“하비브 대사가 어느날 내게 전화를 걸어와 ‘김대중이 도쿄의 호텔에서 납치됐다. 그들은 김대중을 죽일 것이다. 내일 아침까지 김대중이 어디에 있는지, 그리고 누가 김대중을 납치했는지를 확인해 보고하라. 우리는 그를 살릴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내게 지시했다. 나는 다음날 아침, 하비브에게 ‘중정이 김대중을 납치했으며, 김대중은 대한해협의 배 위에 손발이 묶인 채로 있다’고 보고했다. 김대중이 납치됐을 때, 중정이 이를 감행했다는 것은 내가 이후락을 처음 만났을 때 가졌던 인상에 비춰볼 때, 하나도 놀라운 일이 아니었다.”

- 하비브 대사는 김대중의 납치를 어떻게 알게 됐나?

“일본 경찰이 하비브 대사에게 납치 정보를 줬다.”

- 하비브 대사는 이후 어떻게 했나?

“그는 박정희 대통령에게 편지를 보냈다. ‘중정이 김대중을 납치했다. 김대중을 죽여서는 안된다’고. 하비브 대사가 곧바로 청와대로 달려가 박 대통령을 만나는 대신, 편지를 보낸 것은 박 대통령에게 생각할 시간을 주기 위해서였다.”

- 박정희의 5·16 쿠데타를 사실상 묵인했던 미국이 김대중의 납치에는 그렇게 발빠르게 움직인 이유는 뭔가?

“우리는 김대중이 상징하는 가치가 뭔지를 정확히 알고 있었다. 장면으로 상징됐던 ‘민주화’, 당시에는 김대중이 그 상징이었다. 만일 김대중이 박정희에 의해 살해된다면, 이것은 한국의 민주주의를 또한번 뒤로 후퇴시켰을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자신의 정적을 살해하는 정부와 밀접한 관계를 유지하고 싶지 않았다. 우리는 김대중을 살리기 위해 무척 애썼다.” 

- 당시 김대중을 살린 것은 하비브 대사와 당신이다. 그러나 미국 정부는 5·16 쿠데타 당시에도 그러했던 것처럼 박정희 정권이 김대중을 어떻게 하든지 상관하지 않았던 건 아닌가?

“아니다. 절대 아니다. (미국 정부는) 김대중의 납치에 대해 매우 크게 걱정했고, 관여했다.”

- 당시 하비브 대사가 본국의 지시를 받고 당신에게 지시를 내리고, 박정희에게 편지를 보낸 건 아니지 않나?

“그건 당시 상황이 워낙 급박했기 때문이다. 매우 빨리 서둘러야 했다. 그리고 당시 한국에 대해선 하비브가 책임자였다.”

- 그렇다면, 일단 조치를 취한 뒤 본국에 보고했다는 뜻인가?

“그렇다. 하비브가 내게 전화를 걸어 이렇게 말했다. ‘서두르지 않으면 김대중이 죽는다. 그렇다면 김대중이 죽을 뿐 아니라, 앞으로 우리와 박정희와의 관계도 훨씬 더 어려워진다’고. 박정희가 김대중을 죽였다는 것을 알고 있을 때, 우리가 박정희를 어떻게 대할 수 있겠나? 결국 김대중이 살았고, 그것이 박정희와의 관계를 지속하는데도 도움을 줬다.”

- 미국이 김대중을 박정희 이후 새로운 정치세력의 대안으로 생각했나?

“물론이다.”

- 박정희가 (그런 미국의 생각을) 읽었던 것 아닌가?

“아마 박정희는 그점을 두려워했으리라 본다. 그가 유신으로 향한 또다른 이유는 그가 더이상의 선거를 두려워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는 (1971년 대선에서) 김대중에 거의 질 뻔 했다.”

- 당시 납치는 이후락의 지시였나? 박정희의 지시였나?

“박정희와 이후락은 함께 술을 마시곤 했다. 어느날 밤 박정희가 술에 취해 김대중을 욕하며, 김대중을 죽여버렸으면 좋겠다는 식의 말을 했을 것이다. 그러자 이후락이 박정희의 뜻을 알고, 이를 감행했을 수도 있다. 지난 2008년 김대중 전 대통령을 만나 물어보았다. ‘당시 납치는 누구의 지시였냐?’고. 김 전 대통령은 ‘박정희의 지시였다’고 내게 답했다. 다만 그건 김대중의 추측이다.”

- 당시 납치가 위협만 하고, 죽이려고 하진 않았다는 주장도 있다.

“아니다. 그들은 분명 김대중을 죽이려 했다. 김대중이 내게 말하기를 ‘나는 배 위에서 기도하고, 죽을 준비를 했다. 그런데 그때 미 중앙정보국의 비행기가 배 위를 선회했다’고 말했다. 미 중앙정보국은 비행기를 보내지 않았다. 잘못 알려져 있다. 그건 아마 김대중을 찾으려는 일본의 경찰기였거나, 아니면 ‘김대중을 죽이지 마라’는 지시를 내린 한국의 비행기였을 것이다. 왜냐하면 비행기가 다녀간 뒤 김대중은 배에서 손발이 풀려났다.” 

- 당신은 이후 최종길 교수 고문치사 사건에 대해 이후락에게 항의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렇다. 김대중 납치 사건으로 인해 서울대에서 항의시위가 벌어졌고, 그 와중에 최종길 서울대 교수가 중정에서 조사를 받던 중 숨졌다. 우리는 중정이 고문을 하다 최 교수가 숨지자, 유리창 바깥으로 시신을 떨어뜨려 자살을 위장했는지, 아니면 최 교수가 더이상의 고문을 피하려고 유리창으로 뛰어내렸는지 정확히 모른다. 그러나 최 교수가 고문당했고, 그가 유리창 바깥으로 떨어졌다는 것은 분명하다.”

- 최 교수가 고문당한 것을 어떻게 알았느냐?

“더이상 자세히는 말하기 곤란하다. 그러나 우린 (당시)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알았다.”

- 최 교수가 중정의 고문으로 숨졌다고 믿나?

“그렇다. 당시 나는 미국 중앙정보국 본부에 이 사실을 보고하면서 ‘나는 이에 대해 (한국 정부에) 항의하려 한다. 나는 국민들을 이렇게 다루는 조직과 일하고 싶지 않다’고 했다. 그때 워싱턴의 본부에서 온 메시지는 이랬다.‘그들(중정)로부터 한국인을 구하려 애쓰지마라. 너의 임무는 사실을 보고하는 것 뿐이다’라고.”

- 그러나 당신은 박종규 경호실장에게 ‘이후락 부장과 더이상 같이 일할 수 없다’고 항의하지 않았나?

“그렇다. 나는 명령을 어겼다. 나는 박종규 경호실장에게 갔다. 나는 박 실장이 남자다워서 좋아했고, 박 실장이 이후락을 싫어하는 것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나는 박 실장에게 ‘내가 상부의 어떤 승인이나 지시를 받고 얘기하는 건 아니다. 다만 내 심정이다. 최 교수에게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나도 알고, 당신도 안다. 중정의 일이다. 나는 북한에 맞서 중정을 돕기 위해 한국에 왔다. 그런데 나는 중정은 북한에 대해 일하기보단, 박정희 정권의 반대세력을 억누르는데만 골몰한다. 나는 이런 식의 관계가 매우 불편하다’고 말했다. 그때 박종규는 이를 메모했다. 표정이 매우 진지했다. 그리고 나는 내 사무실로 돌아와 기다렸다. 1주일 뒤, 이후락이 경질됐다. 이후락은 이후 한국을 떠나 카리브해(영국령 바하마)로 도망갔고, 박 정권이 그를 찾아내 다시 한국으로 불러들였다.”

- 박 대통령이 그 모든 것에 관여했나?

“물론이다. 이후락의 뒤를 이어 신직수 전 법무장관이 중앙정보부장이 되었다. 그는 내게 말하길 ‘나는 이 정부에 저항하면서 불법행위를 하는 사람들에게 강경하게 하는 것과 동시에 이 정부를 지지하면서 불법행위를 일삼는 사람들에게 똑같이 강경하게 대처하겠다’고 했다. 신직수는 중정에 ‘고문을 중지하라’는 내부명령을 내렸다.”

- 그러나 이후락이 물러났지만, 1974년 민청학련 사건, 1975년 긴급조치 9호 등 오히려 유신정권의 독재체제는 더 강화됐고, 73년 그때보다 더 많은 사람들이 민주화운동으로 인해 감옥에 갔다.

“맞다. 그러나 그건 한국인들의 민주주의에 대한 열망이 점점 강해졌기 때문인 것으로 본다. 그러나 적어도 이후락이 떠나고, 신직수가 (중앙정보부장으로) 들어온 뒤로 중앙정보부는 확실히 바뀌었다. 박정희는 미국과의 관계를 위해 자신의 2인자인 이후락을 기꺼이 제거할 정도로 정치적 감각이 뛰어난 인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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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은 박정희의 반공 때문에 5·16 안막아”

당시 미국 외교정책은 냉전의 관점에서 상황을 봤다. 그러나 김대중을 구한 건 정적을 살해하는 정부와 관계를 유지하고 싶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 박정희의 핵개발

- 그러나 박정희는 그즈음 핵개발 시도로 인해 미국과의 관계가 악화된 것 아닌가?

“한국은 10년간 미국의 요청으로 베트남전에 참전했다. 한국은 베트남전을 통해 미국으로부터 얻은 외화로 새마을운동을 벌이는 등 경제발전을 위한 ‘시드머니’로 활용했다. 그러나 또하나 베트남이 무너지면, 도미노처럼 공산화가 번져 한국도 위험하다고 봤던 것도 한국의 베트남전 참전의 한 이유였다. 그런데 내가 1973년 한국에 왔을 그때, 미군은 베트남에서 철수했다. 박정희는 이걸 보면서 미국과의 동맹에 대한 믿음을 잃기 시작했다. 그가 핵개발에 나선 이유다”

- 핵개발 시도가 당시 한-미 관계 악화의 주원인이었나?

“물론이다. 박정희는 ‘나는 베트남에 30만명을 보냈다. 그런데 미국을 믿을 수 없다. 우리 스스로 우리를 지켜야 한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1970년대 동북아시아에 비밀리에 핵무기를 개발하고, 국민들을 고문하는 나라가 있었다. 사람들은 북한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아니다. 그건 남한이다. 1970년대의 남한과 오늘날의 북한은 여러 점에서 흡사하다.”

- 박정희가 핵무기를 개발에 착수한 시점이 언제인가?

“대략 1972년 무렵이다.”

- 미국이 곧바로 그 사실을 알았나?

“아니다.”

- 언제 그 사실을 알게 됐나?

“1973년이다.”

- 어떻게 알게 됐나?

“그건 말하기 곤란하다.”

- 그래서 어떻게 했나?

“그걸(핵무기 개발을) 멈추게 했다. 나는 본국에 (한국의 핵무기 개발 추진을) 보고했고, 미 정부는 매우 조심스럽게 이를 멈추도록 한국 정부에 요구했다. 2011년 북한에 대해 미국이 핵개발 억제를 위해 애쓰는 것과 똑같았다.”

- 박정희를 어떻게 설득했나?

“우리가 북한으로부터의 어떠한 공격에도 남한을 보호할 것이며, 따라서 남한이 핵무기를 지닐 필요가 없다는 것을 강하게 재확인시켰다.”

- 그래서 그가 포기했나?

“그렇다.”

- 언제?

“몇 년 뒤, 1977년 무렵이다.”

- 미국이 한국을 보호하겠다고 했지만, 이후 지미 카터 대통령은 미군 철수를 공언했다.

“그렇다. 그건 카터의 잘못이다.”

- 핵을 포기했는데, 카터는 왜 박정희를 싫어했나?

“박정희는 독재자였다. 이는 (인권을 중시하는) 카터와는 잘 맞지 않는다. 또 카터는 박정희가 핵무기를 개발하려 했다는 것도 잘 알고 있었다.”

- 카터가 미군 철수를 계획하자, 박정희는 다시 비밀리에 핵개발을 시도했고, 이때문에 미 중앙정보국이 김재규를 시켜 박정희를 암살케 했다는 루머가 한국사회에 오랫동안 떠돌았다.

“말도 안된다. 넌센스다.”

■ 물러나려 했던 박정희?

“당시 박정희는 경호실장 차지철과 술을 많이 마셨다. 아마 김재규는 차지철이 박정희에게 나쁜 영향을 미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내가 이해할 수 없는 것은 김재규가 왜 박정희를 쏘았냐 하는 점이다. 그 마지막 술자리에서 차지철이 김재규를 자극했고, 그래서 김재규가 차지철을 쏘았을 것이다. ”

- 그렇다면 10.26이 돌발적으로 일어났다는 뜻인가?

“내가 설명할 수 있는 건 그게 전부다.”

- 미국은 박정희 정권 내부에서의 암살 가능성을 예견했나?

“전혀 아니다.”

- 1976년 당신은 텍사스대 연설에서 ‘박정희가 다음 선거에서 당선되더라도, 그가 그 임기를 마치지 못할 것이다’고 했다. 그건 무슨 뜻으로 한 말인가?

“나는 박정희가 다음번 선거에 나서지 말아야 한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또 그러기를 바랐다. 당시 한국 국민들의 민주화 요구는 점점 커져갔고, 박정희에 대해 지쳐있었다. 또한번의 임기 연장은 사회를 더욱 불안하게 만들 수 있고, 그 경우, 예상할 수 있는 가능성은 또한번의 쿠데타 또는 암살이다. 나는 나의 예감이 적중한 것에 대해 유감스럽게 생각한다. 그래서 나는 다음번 선거(1978년)에는 박정희가 나서지 않을 수도 있다고 봤다.”

- 76년 무렵, 미 중앙정보국이 한국의 쿠데타 시도를 박정희 정권에게 전했다는 이야기가 있다.

“금시초문이다. 그것에 대해 들은 바 없다.”

- 그럼 박정희가 물러나려 했다고 생각한 구체적 이유가 있나?

“박정희는 1974년 부인 육영수씨가 숨진 뒤, 물러날 생각을 했던 것으로 안다. 그해 가을 서울 북쪽에 있는 한양 골프장에서 박정희와 함께 골프를 칠 기회가 있었다.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 11월 제럴드 포드 대통령과 헨리 키신저 국무장관이 온 직후였다. 당시 소련 블라디보스톡을 방문한 뒤 서울에 온 포드는 ‘미국은 한국을 북한과 소련으로부터 충분히 지켜낼 것이다. 우리의 동맹관계에 대해 염려하지 마라’는 메시지를 전하기 위해 왔다. 박정희는 상당히 만족했고, 우리를 골프행사에 초청했고, 골프가 끝난 뒤 저녁식사를 함께 했다. 그 자리에는 국방장관 등 고위인사들이 함께 참석했다. 그런데 다들 육군사관생도처럼 바짝 긴장한 채 술을 마셨다. 박정희가 말을 안 하면, 아무도 말을 꺼내는 이가 없었다. 그래서 내가 박정희에게 이렇게 말했다. ‘각하께서 터키의 케말파샤와 비교된다는 걸 아십니까?’라고. 그러자 박정희가 나한테 ‘이 친구가 지금 뭘 말하려는거야? 나는 케말파샤에 대해 잘 모른다. 그러나 나는 그가 터키를 경제적으로 강하고, 군사적으로 안전하게 만든 것처럼 나도 한국에서 그렇게 하길 원한다. 그러나 나는 (케말파샤처럼) 죽을 때까지 대통령직에 영원히 있진 않겠다. 어쩌면 나는 이미 너무 오랫동안 이 자리에 있는지도 모른다. 만일 지난번(1972년)에 대통령에 나서지 않았다면, 내 처는 아직도 살아있었을텐데’라고 말했다. 그 자리에 있던 우리 모두는 ‘아, 박정희가 다음 대선(1978년)에는 안 나올 수도 있겠구나’라고 생각했다.”

- 그러나 그는 (1978년 체육관 선거를 거쳐) 9대 대통령에 또 취임했다.

“그렇다. 아마 차지철이 ‘각하, 안 됩니다. 각하만이 대한민국을 지킬 수 있습니다’라며 강하게 만류했을 것이다. 차지철 외에도 박정희 주변 사람들 상당수가 그렇게 했을 것이다.”

- 박정희가 지쳤던 것인가?

“그렇다. 만일 그때 박정희가 스스로 물러났다면, 그는 지금보다 훨씬 더 존경받았을 것이다. 그리고 그랬다면 전두환은 없었을 것이고, 한국의 민주주의도 훨씬 빨리 이뤄졌을 것이다.”

- 박정희는 김종필에게 정권을 물려주려 했던건가?

“아마도. 김종필은 내가 알기에 3김 중 정치적 감각이 가장 뛰어난 인물이다. 김대중은 더 넓은 비전을 가졌지만, 정치적인 영민함은 김종필이 우위였다. 만일 김종필이 박정희를 이어 대통령이 됐다면 한국에 민주주의를 가져오는, 매우 뛰어난 대통령이 됐을 것이다.”

■ 박근혜

“재미있는 이야길 하나 하겠다. 2001년 임동원 국가정보원장이 평양을 방문해 김정일 국방위원장을 만났을 때의 이야기다. 김정일은 그때 임 원장에게 ‘내가 인터넷으로 매일 남한 뉴스를 본다. 또 청와대 웹사이트도 흥미롭게 본다. 청와대 웹사이트에서 본 대통령 이야기 중 나는 박정희에 대해 제일 감명깊게 읽었다. 북한에도 박정희와 같이 경제발전을 이룩해낼 사람이 필요하다. 나는 박정희가 남한에서 이룩한 일에 대해 깊이 존경한다. 그런데 따님 박근혜씨가 정치를 하고 있는 것으로 안다. 박근혜씨가 북한을 방문해주면 좋겠다’고 말했다. 임 원장은 이런 뜻을 박근혜씨에게 전했고, 박근혜씨가 이를 받아들여 2002년 북한을 방문했다.”

- 박근혜 전 한나라당 대표는 김정일 위원장에게 무얼 이야기했나?

“정확히는 모른다. 그러나 2002년 월드컵 경기장에서 박 전 대표를 만나 북한에 갔다온 것을 축하한다고 말하자, 박 전 대표는 ‘우리는 과거의 아픈 기억이 아니라, 낙관을 갖고 미래를 봐야한다’고 말했다. 깊은 인상을 받았다. 그는 아버지의 영민함과 어머니의 부드러움을 다 물려받았다.”

- 일각에서는 박근혜가 대통령이 되는 것은 과거회귀라는 주장도 한다.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그는 아버지의 유산을 물려 받았지만, 아버지와는 아주 다른 인물이다. 나는 오늘날 한국정치에서 그녀가 매우 건설적인 역할을 한다고 생각한다.”

■ 박정희에 대한 평가

- 박근혜 전 대표가 대통령이 되면, 박정희에 대한 평가도 달라질까?

“이미 변하고 있다. 내가 1951년 한국전쟁 당시 조지아주 공군기지에서 낙하산 훈련을 받을 때였다. 훈련소 부근의 맥주집에 코미디언이 만담을 하곤 했다. 당시 군인들을 상대로 코미디언은 ‘당신 앞에 3가지 질환이 놓여있고, 그중 하나를 택해야 한다. 어느 걸 택하겠느냐? 매독, 임질, 그리고 한국행’이라고 말했고, 우린 모두 웃었다. 한국은 당시 우리들에게 그 정도로 인식됐다. 그런데 나는 지난해 바로 그 조지아주의 기아자동차 공장에 갔다왔다. 조지아주 주지사가 그 자리에 있던 정몽구 현대·기아자동차 회장에게 ‘조지아에 공장을 세워줘 고맙다. 이 공장은 조지아주 역사상 가장 큰 발전을 가져왔다’고 말했다. 그만큼 한국은 발전했다. 박정희는 그러한 한국의 발전에 상당한 기여를 했다. 나는 지금까지 한국의 가장 뛰어난 대통령 3명을 꼽으라면, 박정희 노태우 김대중을 든다. 노태우는 상대적으로 저평가돼 있지만.”

- 그러나 한국의 30~40대에게서 박정희는 나라를 발전시킨 대통령보다 독재자로 더 많이 인식되고 있다. 50대 이상은 또 다르게 생각하겠지만.

“그렇다. 나도 박정희가 그 두 가지 측면을 다 갖고 있는 것으로 보고 있다. 그러나 나는 박정희에 대해 깊은 존경심을 갖고 있다. 나는 그의 판단력, 전략적 감각, 한국의 경제발전, 그의 실용적 측면 등을 모두 존중한다.” 

- 개발도상국에서는 ‘선 경제발전-후 민주화’라는 주장을 하는 학자들이 있다. 당신도 그런 견해를 갖고 있나?

“나는 경제와 민주주의가 완전히 분리된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1987년 직접선거가 시행됐고, 이후 한국의 민주화가 가속화됐다. 나는 그 이유가 경제발전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하다고 본다. 북한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북한이 경제적으로 발전한다면, 북한도 (국제적인) 고립에서 나오게 될 것이며, 북한 주민들을 더 낫게 대우할 것이다. 내가 북한에 대한 경제지원에 관심이 있는 이유도 그때문이다.”

아몽크(뉴욕주)/글·사진 권태호 특파원

ho@hani.co.kr

■ 그레그는

1973~76년 한국CIA 맡아 주한 미국대사로 일하기도

도널드 그레그(83)는 30년간 미국 중앙정보국(CIA)에서 일했다. 1951년부터 미 중앙정보국 생활을 시작해 70년대 초까지 사이판, 미얀마, 일본 등 주로 동아시아에서 일했다. 한국전쟁에 참전했고, 70~72년에는 베트남전에도 관여했다. 73~76년 미 중앙정보국 한국지부 총책임자로 있으면서 유신정권의 상황을 지켜봤다. 79~81년 국가안보회의(NSC) 참모로 일했고, 82~88년에는 로널드 레이건 대통령의 안보담당 보좌관을 역임했다. 89년 조지 부시 대통령에 의해 당시 노태우 정부의 주한 미국대사로 임명돼 93년까지 대사로 있었다. 2009년 8월까지 한·미 양국간 이해증진을 목표로 한 비영리단체인 코리아소사이어티 회장을 맡았다.

■ 인터뷰 후기

“한국분단, 미국 책임 상당…미안합니다”

도널드 그레그 전 대사는 현재 뉴욕시 북쪽의 아몽크라는 오래된 시골마을에 아내와 단둘이 조용히 지내고 있다. 소박한 그의 집은 주한 미국대사를 마치고 귀국하면서 장인·장모의 집을 물려받은 것이다. 1845년에 지어진 이 집은 그의 아내가 태어나 어린 시절을 보낸 곳이기도 하다. 그레그 전 대사는 2시간여의 인터뷰가 끝난 뒤, 한국에 있을 당시 수집했던 도자기, 고서화 등을 보여주기도 했다.

그는 오랜 중앙정보국(CIA) 요원 생활을 했고, 주로 공화당 정부에서 요직을 맡았지만, 이데올로기적 관점에선 상당히 자유로웠다. 그는 “사람들은 시아이에이 요원들은 대개 우파일 것이라 생각하지만, 시아이에이는 사실(fact)이 뭔지 캐내는 사람이다. 장막 뒤의 실체를 파악하기 위해 애쓰는 것”이라며 시아이에이에 대한 강한 자부심을 드러냈다. 그는 한국에 대해 “한국의 분단에는 미국에 상당한 책임이 있다”며 한국말로 ‘미안합니다’라고 말하며 자신이 한국에 계속 관심을 갖는 이유 중의 하나라고 설명했다. 그레그 전 대사는 지난해 천안함 침몰이 북한의 피습이 아닌, 사고일 가능성이 높다고 주장해 관심을 모았다. 인터뷰 말미에 이를 묻자, “나는 천안함 침몰이 북한의 소행이 아니라고 본다. 여기에 대해 얘기하려면 또 이번만큼의 장시간 인터뷰를 해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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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1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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