터키 해수욕장에서 만난 6·25참전용사의 눈물

2013.03.10 06:39

관리자 조회 수:3669


 

1998년 8월 터키 이스탄불 부근의 해수욕장. 필자는 백사장 파라솔에서 누워 파인애플 주스를 홀짝거리며 물놀이에 열중하고 있는 비키니 차림의 러시아 아가씨들 몸매를 감상(?)하는 호사를 누리고 있었다. 당시 쿠르드족 문제를 취재하고 있었는데 취재는 제대로 이뤄지지 않았다. 터키 당국이 쿠르드족 문제에 매우 민감하게 반응하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쿠르드족 자체도 여러 정파로 나뉘어 서로 헐뜯고만 있었기 때문이었다.

하여튼 다소 시간이 남아 지친 몸과 마음을 추릴 겸 지중해에 인접한 해수욕장에 들렀다. 해수욕장은 러시아 관광객으로 넘쳐흘렀다. 터키가 러시아 관광객들에게 쉽게 비자를 발급해 주었을 뿐 아니라 물가도 저렴했기 때문에 당시 해외여행과 따뜻한 햇볕에 굶주려 있던 많은 러시아들이 터키 해변으로 대거 몰려들었던 것이다.

오랜만에 따뜻한 햇살과 신선한 바람을 즐기고 있는데 한 터키 청년이 다가와 말을 걸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그의 영어를 이해할 수 없었다. 열심히 뭔가 설명하던 그도 내가 전혀 알아듣지 못한다는 사실을 깨닫고 다소 절망스런 표정을 지은 뒤 어디론가 사라졌다. 그리고 몇 시간이 흘렀다. 호텔로 들어가려고 하는데 그 청년이 다른 청년 한 사람을 데리고 왔다. 영어를 할 줄 아는 친구를 데려온 것이었다.

이 통역을 통해 코리언이냐고 물었다. 그렇다고 대답했더니 남(South)이냐 북(North)이냐고 묻는 것이었다. 남이라고 대답했더니 좋아하면서 자기 집에 초대하고 싶다는 것이었다. 자신의 할아버지가 꼭 만나보고 싶어 하신다는 것이었다. 전혀 아는 사람이 없는 이국땅에서 우연히 처음 만난 사람이 초청하는 곳으로 그냥 쫓아갈 정도로 용감한 성격이 아니었다. 그래서 거절한다는 의미에서 “너희 할아버지가 꼭 만나겠다면, 내일 이곳으로 모시고 와라”고 이야기한 뒤 호텔 건물 안으로 들어가 버렸다.

다음날 휠체어를 탄 노인을 모시고 그 청년이 왔다. 이 노인은 6·25 참전 상이용사였다. 1951년 1월 중공군과의 전투에서 다리를 잃은 뒤 자신의 삶을 원망하고 살았다는 것이었다. 한국하면 찢어지게 가난한 나라, 한국인하면 이(lice)가 득실한 사람들로만 생각됐다는 것이었다. 희망이라곤 전혀 보이질 않았으며 도대체 이런 나라를 수호하기 위해 피를 흘러야 하는 이유를 이해할 수 없었던 것이 참전 당시의 솔직한 심정이었다고 한다.

터키 해수욕장에서 만난 6·25참전용사의 눈물

그렇기에 당시 전사한 동료들의 죽음은 ‘개죽음’이었으며, 자신의 부상은 무가치한 것으로 생각했다는 것이었다. 한국 소식은 거의 들리는 것이 없었고 간혹 뉴스가 나오면 온통 혼란과 정치적 탄압 소식 밖에 없으니 그런 곳을 위해 다리를 잃은 자신이 한심스러울 따름이었다는 것이었다.

이 터키 노병의 생각, 아니 인생을 다시 바꿔 놓은 사건이 발생했는데 그것이 1988년 서울 올림픽이었다. TV를 통해 비춰진 한국의 모습은 경이, 그 자체였다. “정말 저것이 내가 갔었던 한국이란 말인가?” 처음에는 믿을 수조차 없었다. 언론 조작이 아닌가 하는 의구심도 들었다. 그러나 이를 계기로 한국에 대한 소식을 다시 모으기 시작했다. 한국의 발전상은 뉴스가 아닌 생활을 통해 더욱 와 닿기 시작했다. 삼성전자 제품과 현대자동차가 바로 그것이었다. 이러한 사실들이 확인되면서 인생이 변화되기 시작했다. 자신의 삶은 결코 무의미한 것이 아니었다. 자신의 다리가 바로 저런 번영을 일궈내기 위한 밑거름이었다고 생각하니, 자신의 삶이 더없이 값진 것이 됐다.

이 할아버지는 필자를 잡고 울음을 터트렸다. “정말 고맙다. 너희가 잘 살게 돼서. 만약 너희가 그때(6·25 당시)처럼 계속 굶주림 속에 있었다면 나는 나의 인생의 의미를 찾을 수 없었을 것이다. 왜 남의 나라 내전에 끼어들어 다리만 잃어 버렸나 하고 삶을 원망해 왔는데… 그 전쟁은 단순한 외국의 내전이 아니었어. 자유와 번영을 추구하는 사람들과 이를 파괴하려는 세력의 전쟁이었어. 나는 수백만, 아니 수천만이 자유와 번영을 누리고 살 수 있도록 정말 조그맣기는 하지만 기여를 했다는 자부심을 가지고 살 수 있게 된 거야.” 필자도 함께 울었다. “땡큐”란 말은 필자가 먼저 했어야 하는 말인데, 이 말을 필자가 들어야 하는 역설적 상황에서, 그저 눈물이 앞을 가릴 뿐이었다.


황성준 편집위원·동원대 초빙교수


회원:
0
새 글:
0
등록일:
2010.11.10

지 부 연 락 처

회 장: 이 강일

Email: ustkdn1@hotmail.com
Tel. 254-681-6063


부회장: 이 상만


부회장: 장 영권


간 사: 강 성우


자문위원: 이 용원


자문위원: 김 국현


총 무: 이 성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