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스톤 학살사건 이란?

2012.08.26 04: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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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스톤 학살 사건이란?

<보스톤 학살 광경을 담은 폴 리비어의 판화>
<보스톤 학살 광경을 담은 폴 리비어의 판화>

영국의회는 1767년 타운센드법이라 불리는 자극적인 세금안을 또 다시 생각해냈다. 식민지인들은 이번에도 보이콧을 했고 영국의 수출은 절반으로 줄어들었다. 식민지인들이 저항하자 영국은 늘 써왔던 강경한 방식을 다시 들고 나왔다. 군대를 파견한 것이다. 

그후 오래지 않아 인구 1만 6천 명의 도시로 식민지 저항의 근원지였던 보스턴에 영국군 4천명이 도착했다. 1770년 3월 밧줄 제조 노동자들과 영국군 한 부대 사이에 싸움이 벌어졌다.

병사들과 성난 시민들 사이의 충돌은 날이 갈수록 빈번해졌다. 그러다 3월 5일 급기야 술에 취한 한무리의 부두 노동자가 본대에서 이탈한 영국군 아홉명과 충돌하는 일이 벌어졌다.

돌과 함께 눈, 얼음이 병사들 쪽으로 날아가면서 상황은 험악해졌다. 군중 속에서 누군가 ‘불이야’라고 소리지른 것이 폭동의 신호탄이 되었다. 병사들이 총을 발사하자 노동자 다섯 명이 쓰러져 죽었다.

새무얼 애덤스가 주동이 된 선동주의자들이 그 기회를 포착하는 데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이 일은 며칠 후 보스턴 학살사건이 되었고 사망자들은 순교자가 되었다. 화가 존 코플리의 이복형제 헨리 펠함은 총격 장면을 조각으로 새겼다.

은세공업자 폴 리비어가 그 조각을 빌려가 학살사건 판화로 만들자 인쇄업자가 그것을 가져갔고 얼마 지나지 않아 그것은 성화가 되었다. 보스턴 인구 1만 6천명 중 적어도 1만여명이 사망자들의 장례식에서 행진을 했다. 

그 사건 후 영국군은 보스턴에서 철수했다. 공교롭게도 학살이 일어난 날 타운센드법이 폐지되어 식민지에는 비교적 평화로운 기간이 이어졌다. 사건에 연루된 병사들은 재판에 회부되었지만 대부분 무죄로 방면되었고 이 중 두 명은 불명예 제대했다. 하지만 이것은 불안한 휴전에 불과했다. 

*출처: 미국에 대해 알아야 할 모든 것, 미국사 (케네스 데이비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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