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주영 회장의 사랑, 인생, 자취

by YES! posted Apr 25, 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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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 핸리"의 "마지막 잎새"보다 더 소설같은
소설을 읽는 것 같이 아주 잼 있습니다.
한 번 읽어보시고 밑으로 갈 수록
볼 만 한 사진들이 많습니다.
 
 
 
사나이’정주영’을
 
울린 세여인
 
 
 
부인 변중석 여사, 단골 요정의 마담,
 
고향의 첫사랑 여인과 운명적 관계
 
2007년 8월17일 고 정주영 현대그룹 명예회장의
부인 변중석 여사의 빈소에서 조문객이 참배하고 있다.
 
고(故) 아산 정주영 명예회장에게는 죽어서도
잊지 못할 세 명의 여인이 있었다.
 
부인인 고(故) 변중석 여사, 단골로 드나든 요정 마담,
 평생 잊지 못하고 살았던 첫사랑의 여인인
고향 통천의 이장 집 딸이 그 주인공이다.
 국내 최대 재벌이라 불렸던 고 정주영 명예회장
인생을 통틀어 이 세 여인만이
 그의 마음에 자리 잡았고 한평생 맴돌았다. 
 
이익치 전 현대증권 회장은 고 변중석 여사를
‘살아 있는 천사’라고 묘사했다.
고 변중석 여사는 종갓집의 큰며느리 역할을 톡톡히 해냈다.
매일 자정이 되어서 귀가하는 정주영 회장의
목욕물을 준비하고
다시 새벽 3시에 일어나 아침밥을 준비했다.
남편 얼굴을 볼 시간도 거의 없이 일복(속칭 ‘몸빼’)을
입은 허름한 옷차림과 화장기 하나 없는 맨얼굴로
날마다 본사 직원 3백여 명의 점심을 준비했다.
더욱이 자식 양육까지 도맡았다.
항상 미소를 잃지 않고 어떤 경우에도
화내거나 싫은 기색을 내보이지 않았다고 한다.
 
변여사는 정주영 회장을 여보나 당신 대신 항상
 ‘회장님’이라고 불렀다.
정주영 회장의 어머니인 시어머니에 대해 물어도
“자신보다 열 배는 부지런한 분이시다”라며
칭찬을 아끼지 않는 사람이었다.
심지어 고 정주영 전 명예회장이 핏덩이를 자식이
라고 데리고 와 “잘 키우라”라고 했을 때도 아무
아무 싫은 내색 없이 자기 자식으로
받아들였다고 한다.
그녀는 고 정회장의 곁에서 평생 함께하며
그의 안위를 보살핀 조강지처였다.
 
 
 미모의 마담, 큰돈 빌려주고 살자
 
두 번째 여인은 정주영 회장이 태어나
처음으로 맞닥뜨린 절체절명의
위기 상황에 나타났다. 낙동강 고령교 복구 공사에
자신만만하게 도전했던 정회장은 여름에 불어난
물과 부족한 장비,
극심한 인플레이션으로 막대한 손해를 입었다.
 공사 진척도 보이지 않고 재정도 바닥난 상태였다.
인부들은 밀린 노임을 지급하라며 파업해 일은
거의 중단되었고 모든 돈을 쏟아부었지만
사채 조달도 힘든 지경에 이르렀다.
정회장은 당시 사채놀이를 크게 하고 있던 요정 마담을
만나 자금을 부탁했다.
 
 그녀는 더 이상 돈을 융통하기 어려웠던 정회장에게
필요할 때마다 자금을 지원했다.
정회장이 접대를 위해 자주 찾은 그 요정은
당시 제일가는 요정으로 손꼽히던 곳이었는데,
마담은 천하일색에 여전(현재의 대학)까지 나온,
미모와 지성을 겸비한 여인이었다.
단골손님이었던 정회장은 소박하고 검소한
모습과 친절하고 따뜻한 마음 씀씀이로
요정 내에서 높은 인기를 누렸다.
말이 청산유수라는 마담도 정회장 앞에서는
 얼굴이 빨개지고
말도 잘 못할 정도였다고 한다.
 
그녀가 돈을 보내줄 때마다 오인보 당시 경리
책임자가 서울에 가서 받아오곤 했다.
어느 날 요정 마담이 정회장에게 “한 번은
꼭 보고 싶다.
이번에는 직접 와 달라.
서울에 꼭 들러 달라.
준비를 좀 많이 했으니 도움이 될 것이다”라고 했다.
정회장은 볼 면목이 없다며 오인보를 보냈고
평소보다 세 배가 넘는 큰돈과 편지를 받았다.
정회장은 편지를 읽고 깜짝 놀랐다.
그 편지는 다름 아닌 유서였다.
‘꼭 성공하고 앞으로 더 큰일 많이 하기를 바란다’
는 내용이었다.
 
그 후 정회장은 그녀가 자살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좋아했던 정회장을 위해 요정 마담은 계속해서
큰 빚을 내 자금을 댔던 것이다.
그 여인은 죽음으로써 그 빚을 모두 안고 떠났다.
정회장은 마담의 장례식을 치르고
장지에 다녀오면서 오인보와 함께 울었다.
 
정회장은 그녀에게서 받은 마지막 돈으로
밀린 노임을 해결하고
일부 이자를 갚아 다시 일을 시작했다.
사업 실패를 코앞에 두고 자살까지 생각했던
정회장은
마담이 그를 대신해 죽었다 생각했다.
그녀의 죽음은 생사의 기로에 섰던 정회장에게
 ‘아무리 어려운 일을 만나도 긍정적으로 생각하면
해결할 수 있다’라는 교훈을
뼛속 깊이 새기고 살아가게 했다.
 
 정회장의 첫사랑은 ‘오헨리’의 소설
<마지막 잎새>의
나뭇잎 같이 삶을 지탱하는 힘이었다.
통천 이장 집 딸이었던 정회장의 첫사랑은
통천에서도 제일가는 부잣집 딸이었다.
경성(지금의 서울)에서 발행하는 동아일보를 유일하게
구독하는 집이었다.
정회장은 매일 새벽 네 시에 일어나 하루 종일 농사일을
하고 몸에 진이 다 빠진 후에도
이장 집에 가 동아일보를 받아 올 생각만 하면
20리 떨어진 길도 100m 달리기 선수처럼 쏜살같이
달려갈 수 있었다고 한다.
그는 당시 동아일보에 연재되고 있던
이광수의 <흙>을 보며
‘허숭’처럼 경성에 가 변호사가 되겠다고 결심했다.
 
 두 살 많은 이장 집 딸에게도 농군의 모습이 아닌
변호사의 모습을 보여주고 싶었기 때문이다.
신문을 받을 때마다 꿈에서나 볼 수 있는 천사같이
예쁜 그녀의 모습에
소년 정주영은 눈이 부시고 가슴이 울렁거려 얼굴
한번 제대로 쳐다보지 못했다.
얼굴이 빨개지고 화끈거려 땅바닥만 바라보았고
신문을 주는 손만 봐도 천사의 손보다 더
곱다고 생각했다.
<흙>과 이장 집 딸 때문에 하루가 어떻게 가는지도
몰랐던 그때 그의 나이는 열일곱 살이었다. 
 
꿈을 이루겠다고 네 번의 가출 끝에 고향 통천을
떠난 정회장은
온갖 고생 끝에 광복 이후 현대건설 간판을 걸고
건설업과 자동차 수리업을 해 꽤 큰돈을 벌었다.
 정회장은 항상 마음에 품고 살던 첫사랑이
보고 싶어 고향을 찾아가기로 했다.
하얀 신사복에 앞이 뾰족한 백구두를 신고,
모자도 쓰고, 좋은 시계도 찼다.
당시 아주 멋쟁이 같은 모습으로 친구 김영주와
함께 고향에 가 그녀를 만났다.
하지만 그녀는 이미 결혼해 아이를 둘이나
두고 있었다.
그녀는 신랑을 소개해주면서 밥을 차려주었지만
정회장은 여전히 그녀가 너무나 예뻐
얼굴도 쳐다보지 못했다. 가슴이 울렁거려 밥도
제대로 먹지 못하고 식사를 끝냈다.
사랑방에서 하룻밤을 지내며 그 여자 생각에
잠을 이루지 못했다.
아침 식사 대접을 한 번 더 받고 준비한
선물을 준 뒤 헤어졌지만
그 후 오랜 세월 첫사랑은 정회장의
가슴속을 떠나지 않았다.
 
그렇게 67년이 흘렀고 17세 소년이었던
정주영은 84세의 한국 최대 재벌이 되었다.
그는 이익치 회장에게 자신이 북한에 가려는
이유는 두 가지라고 설명했다.
먼저는 국가와 민족의 통일, 두 번째는
사랑 때문이라는 것이었다.
그는 이익치 전 회장에게 김정일 위원장에게
그 여인을 찾아달라는 부탁을 하라고 지시했다.
북한에서 첫사랑을 데려와 매일 아침 손잡고
걸어서 출근하고 싶다는 소망을 내비쳤다.
정회장은 서울 가회동에 첫사랑과 함께 살 집을
마련하라고 이익치 회장에게 지시했다.
이회장은 가회동에 매물로 나온 전 화신산업
박흥식 사장의 집을 70억원에 매입했다.
가회동 2층에 침실을 마련했고 그날부터
정회장은 가회동에서 기거했다.
 
 
북한까지 가서 찾은 첫사랑
 
‘이장 집 딸’
 
 
 
정회장에게 첫사랑에 대한 희망은 곧 삶에
대한 희망이었다.
 2000년 초 자식들의 재산 싸움을 보면서
정회장은 큰 충격을 받았다.
 
정씨 일가의 경영 일선 퇴진과 전문 경영인
체제 도입을 선언했지만 자식들은 이를 거부했다.
정회장은 더욱 큰 실의에 빠졌고 이것은 건강
 문제로 이어졌다.
그러나 마지막 희망이 남아 있었기에
 2000년 6·15 남북 공동선언을 성공시키며
김정일 위원장의 초청을 받아
 6월28일 판문점을 지나 평양에 갈 수 있었다.
 
 그곳에서 정회장은 그가 그토록 보고 싶어 한
첫사랑 여인이 2년 전에 사망했다는
사실을 전해 듣는다.
당시 김정일 위원장의 지시로
북한의 관계 당국이 동원되어 통천 이장 집
딸을 수개월간 찾았다.
북측은 정회장에게 전쟁 때문에 폐허가 된
통천을 떠난 그녀가
청진에서 살다가 죽었다는 사실, 그 가족을
평양에 데려다 놓았으니
원하면 만나게 해주겠다는 말을 전달했다. 
정회장은 북한의 아태평화위 송호경
부위원장에게 한 시간여 동안 
그녀에 대해 꼬치꼬치 캐물었다. 정회장은
“2년 전에만 알았다면
 아산병원에 데려가서 고칠 수도 있었을 텐데
우리가 좀 늦었다”라며 아쉬워했다.
 
그 후 정회장은 다시 북한을 찾지 않았다.
마지막 잎사귀가 떨어지는 것을 본 정주영 회장은
몇 달 후인 2001년 3월 눈을 감았다.
그의 첫사랑은 평생을 그와 함께했고,
결국 그를 데려갔다.
 
 
 
 대 담
 
  
 
(현대 직원들과 어울려 격의 없는 경영주의를 꿈꿔온
아산 정주영 회장의 사진들)
 
 
 
MC : 여기에 있는 사진들에선 누가 대기업에 회장님이고,
누가 직원인지 모를 정도로 허물없이 즐거워 보여요.
회장님에게 근로자들은 어떤 의미가 있습니까?
 
 
峨山 : 나에게 그들은 같이 몸을 부딪히며,
같은 꿈을 꾸는 사람들이란다.
나 자신이 노동자로 사회생활을 시작했고, 지금도 나 자신을
그저 꽤 부유한 노동자라고 생각하는 나의 일생은 기능공,
근로자들과 함께한 세월인 거지. 작업을 몰아칠때는
 혼이 나가도록 무섭게 몰아쳤지만
 
기회가 있을 때마다 그들과 한데 어울려 허물없이
술잔도 나누고 팔씨름도 하면서 육체적으로
 
고달픈 그들의 휴식에 동참하고자 했었다.
 나 또한 그들과 함께 있을 때가 가장 편하고
행복했었으까...
  
 
(하계 수련회에서 직원들과 씨름도 하고 트럼펫을 불던 아산 정주영)
 
 
MC : 회장님에 취미가 궁금합니다. 혹시 회장님도
노래나 스포츠를 좋아하시나요?
 
 
峨山 : 그럼 물론이지. 난 주로 윤향기의 이거야 정말
송대관의 해뜰날, 서유석가는 세월 같은
 
노래들을 즐겨 부르곤 했지.
스포츠도 마찬가지로 많이 좋아했었어.
씨름이랑 야구를 특히 좋아해서
하계 수련회 같은 곳에 가면 내가 그때 나이가
꽤 많았었는데도
새내기 사원들에게 배지기 같은 기술로 이기곤 했었지.
 
MC : 회장님에게 가족의 의미는 남다를 것 같아요.
 
峨山 : 난 유가적 전통에 따라 대가족을 이끌길 원했어.
그래서 많은 식구가 살았지. 무엇보다
이러한 대가족을 이끌게 해준
나의 아내에게 항상 고마움이 있지.
우리 아내는 아직도 재봉틀 한 대를
유일한 재산으로 알고, 자신이 부자라는 인식을
전혀 하지 않는 점을 난 많이 존경한단다.
 
  
 
(아산 정주영 회장과 아내 변중석 여사, 밑으로는 정주영의 대가족 사진)
 
아산  정주영 10주기
 
 
 
추모사진전을 담았 습니다
 
 
  
아산  정주영 10주기 추모사진전을 담았습니다...
 
 
 
대한민국 현대화의 주역인  현대의 창시자
 아산 정주영의  혼을 보는 듯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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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인류의 모든 발전은 긍정적인 사고를 가진 사람들의
 주도 아래 이루워 졌다.... 아산  정주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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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모두가 불가능한 일이라고 할 때도
 "한번 해보기나 했어?" 라는퉁명스러운 반문과 함께,
      불굴의 추진력과 창조적인
 아이디어로 난관을 돌파해 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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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청년 峨山의 모습이다. 
 
峨山은 서울로 올라와 힘겨운 막노동을 하면서도
 "오늘보다 내일"을  확신하며 열심히 일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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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峨山은 1950년 한국전쟁 발발과 함께 전시 수도인
부산에서 미군 공사를 수주하며 발전의 기틀을 마련했다. 
 사진은 미군 공병장교 "맥칼리스터" 중위와 함께 한
峨山(왼쪽 다섯번째). 통역을 맡았던 동생 정인영(왼쪽 세번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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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峨山이 미군과 공사 계약을 체결하고 있다.峨山은
미국 "아이젠하워" 대톨령이1952년 12월 부산 유엔군 묘지를
방문했을 때 낙동강 변의 겨울 보리를 옮겨 심어 파란 잔디처럼
보이게 했다. 이 아이디어로 미군의 신뢰를 얻게 된
峨山은 미국 공사를 독점하다시피 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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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현대건설은 1953~1955년까지 대구근처의 고령교 공사를 맡아
큰 손해를 보면서도 끝까지 공사를 완료했다.  
 덕분에 1957년 9월 전후 최대의 단일공사였던 한강인도교
(현재 한강대교) 공사를 착공해서 1958년 5월 준공시켰다.
사진은 1958년 5월 한강인도교 개통 모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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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4년 현대시멘트 공장 준공식에 참석한 박정희 대통령과 峨山 내외.
峨山은 국내 건설사업의 촉진을 위해서는 건설자재의
국산화가 절실하다는 것을 인식하고 시멘트 공장을 건설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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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우리나라 1인당 국민소득이 고작 105달러에 불과했던 
1965년 14억 7.900만원이라는 어마어마한
공사 금액이 걸린 프로젝트를 수주함으로써
한국 건설업계 최초로 해외 진출에  성공했다.
峨山은  이 공사에서 엄청난 적자를 보왔지만,
최신 장비 사용법과
선진 공법을 익힘으로써 후일 경부고속도로를
건설하는데
필요한 완벽한 기술력을 갖출 수 있었다..
사진은 태국 파타니 나라티왓 고속도로 현장을
살펴보는 峨山의 모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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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70년 7월 "단군 이래 최대의 역사"로 평가받는
경부고속도로 개통식이 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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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70년 7월 峨山의 "우리는 할 수 있다" 는 신념으로 완공된
경부고속도로는 국가의 대동맥으로서 대한민국 사회, 경제
문화 발전의 근간이 되었다. 특히 1968년 2월 착공해
2년 5개월만에 428km의 고속도로를  완공함으로써
 세계 최단시간 완공이라는 기록을 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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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열사의 사막위에 한국 신화를 세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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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75년 국산차 최초의 고유 모델 포니 생산..
 100% 국산차 "포니"로 세계를 놀라게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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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천수만 방조제 공사에서 최종 물막이 공사는 난제중의 난제였다.
 峨山은 일명  "유조선 공법"을 창안해 물막이 공사를 성공했다..
 
   ▲  1983년견 현대중공업에서 직원들과 어울리고 있다. 峨山은
"그들의 이야기에 공감하고 그들의 희망에 귀 기울이는
격의없는 경영주이기를 원했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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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하계수련회에서 직원들과 씨름하는 峨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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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75년 8월 현대건설 신입사원 하계수련대회에서 파안대소하는 峨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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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모두가 불가능이라고 한 88서울올림픽 유치!
1981년 5월 올림픽유치민간추진위원장을
맡은 峨山은 현대의 임직원들과
함께 올리픽 유치를 위해 "죽을 힘을 다해" 노력했다.
 당시 정부는 "창피만 당하지 말라"고 요청했지만,
峨山은 "반드시 유치하자"고 결심했다.
 사진은 서울 올림픽 유치 확정서에 서명하는 峨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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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78년 울산대학교 입학식에서 치사를 하고있다.
峨山은 교육의 중요성을 강조하며
울산대학교와 현대고등학교를 설립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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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98년 6월 16일 峨山은 서산농장에서 키운
 "통일소"를 몰고 북한을 방문했다.
분단 이후 정부 관리의 동행없이
민간인 신분으로  판문점을 통과한 첫번째 인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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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89년 소련 방문 길에 이명박(당시 현대건설 회장)과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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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매일 새벽 3시 30분이면 기상해 하루 일과를
시작했던 峨山.
 청운동 자택으로 찾아 온 아들들과 아침 식사를
같이 한 뒤,
 걸어서 계동 사옥으로  출근하는 것이 관례였다...
 왼쪽부터  몽구,  몽준,  峨山,  몽근,  몽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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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峨山은 변중석 여사와 스물 네살에 결혼했다..
 변 중석 여사는 아내이자  어머니, 맏며느리로서
소박하고 조용한 성품으로 대가족을
보듬으며 峨山을 평안히 내조하였다.
 사진은 1953년 피난지인 부산에서 촬영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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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85년 11월 고희를 맞아 변중석 여사와 함께
기념 촬영을 했다.
 峨山은  "아내가 재봉틀 한 대를 유일한
재산으로 아는 점,
 부자라는 인식을 전혀 하지 않는 점"을
존경한다고 밝힌 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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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설 날 모 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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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련이란.  뛰어 넘으라고 있는 것이지
걸려 엎어지라고 있는 것이 아니다."
  
 
 
옮겨온 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