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문화 속의 나를 생각해 봅시다.
2012.05.17 17:42
‘다문화 소년’의 연쇄방화가 말하는 것
[5월 17일자 경향신문 사설]
한 사회의 성숙도와 개방성을 가늠하기 위한 척도 가운데 하나로 이주 외국인에 대한 구성원들의 시선과 입장을 들 수 있겠다. 외국인들을 차별하지 않고, 시민권적 권리를 부여하며, 더불어 살아가야 할 이웃으로 따뜻하게 포용한다면 그야말로 보편적 세계시민을 지향하는 사회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를 실천하기는 말처럼 쉽지 않다. 모든 측면에서 선진국임을 자처하는 서구의 여러 나라들에서도 민족적 인종적 갈등에서 불거진 적개심과 증오 때문에 심심찮게 심각한 사회문제가 되곤 한다. 취업이나 결혼을 위해 한국에 온 외국 이주민에게 붙여진 ‘다문화’라는 수식어도 외국인에 대한 근거없는 우월의식이나 단세포적인 이질감을 버리고 이들의 문화와 정체성을 존중하자는 그 나름의 선의에서 비롯된 사회적 합의의 징표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엊그제 발생한 17세 ‘다문화 소년’의 서울 화양동 주택가 연쇄방화 사건을 바라보고 있노라면 우리 사회의 ‘다문화’ 운운이 현실적으로는 전근대적 인종순혈주의와 배타적 민족주의 따위의 속살을 감추기 위한 거죽에 불과한 것 아닌가 하는 자괴감을 갖게 된다. 러시아에 유학하던 아버지와 러시아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정모군은 아버지가 학업 도중 교통사고로 사망하고 어머니가 집을 나가버리자 한국의 조부모 밑에서 성장했다고 한다. 정군은 어릴 때부터 푸른 눈동자 등의 외모 때문에 ‘튀기’ ‘소련놈’ 등 주변의 욕설과 따돌림에 큰 고통을 받아왔으며, 한때 6개월 동안 정신과 치료를 받을 정도로 우울증을 앓았다고 한다. 정군은 중학교를 중퇴한 뒤 조부모의 애원으로 고입 검정고시를 거쳐 고등학교에 진학했으나 이번에도 따돌림을 이기지 못하고 학교를 그만뒀다가 방화라는 극단적인 방법으로 자신의 분노와 열패감을 표출하게 된 것이다.
우리는 이번 사건이 그동안 ‘다문화’라는 구호 아래 실시된 각종 정책이나 제도가 이주 외국인들을 한국식 단일문화로 동화시키기 위한 수단으로 기능하지 않았는지 되돌아보는 소중한 계기가 돼야 한다고 생각한다. 또한 외형적으로는 이들을 공존해야 할 이웃으로 존중한다면서도 실제로는 여전히 ‘이질적 존재’로 간주하면서 관리와 통제 대상으로 여기지 않았는지 진지한 반성과 성찰이 뒤따라야 한다고 믿는다. 세계 곳곳에서 이주 외국인으로 살고 있는 한국인들이 그곳의 내국인들과 평화롭게 공존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라도 지금의 ‘다문화’는 민족과 인종을 뛰어넘는 보편적 인권의 가치로 격상돼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