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kip to content

조국 사랑 미주연합

조회 수 1242 추천 수 0 댓글 0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수정 삭제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수정 삭제

이승만이 지킨 독도, DJ가 日에 양보!

이승만 '평화선' - 박정희 '전관수역' -> 김대중 '어업협정'서 바다 내줘

2012년 8월10일 독도를 방문한 이명박 대통령이 '한국령' 글자를 만지고 있다.

▲2012년 8월10일 독도를 방문한 이명박 대통령이 '한국령' 글자를 만지고 있다.

 

2012년 8월 10일은 대한민국 역사에서 오래도록 기억될 아주 중요한 날이 되었습니다. 이명박대통령이 현직대통령으로서는 대한민국 헌정 사상 처음으로 독도를 방문한 날이기 때문입니다.

대통령이 자기나라 땅에 간 것이 뭐 그리 대단하냐는 반문도 있을 수 있겠으나, 십 수 년 전부터 집요하게 독도 영유권을 주장하는 강대국 일본과의 관계를 놓고 볼 때 그 의미를 부여하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전직대통령들이 껄끄럽게 여겼거나 작전상 그랬는지는 모르겠지만, 어찌되었건 독도를 방문할 엄두를 내지 못했던 것만은 주지의 사실입니다.

일제 36년간 한반도를 지배하다 2차대전에서 패망하고 쫒겨간 일본이 독도영유권을 떳떳하게 주장하게 된 결정적인 계기는 김대중정부 때 체결한 소위 신한일어업협정 때문이라는 견해가 지배적입니다.

1952년 1월 18일, 인접해양주권에 대한 대통령선언 즉 이승만 라인에서도 독도는 우리 영토임을 만천하에 공포했었고, 박정희 대통령 시절인 1965년 6월 22일에 체결된 한일 어업협정에서도 독도는 대한민국의 배타적 경제수역(어업수역)으로 설정되었습니다. 그러다 김대중 대통령 시절인 1998년 9월 25일 소위 신한일어업협정에서 독도를 중간수역(공동관리수역)으로 빼버리고 나면서, 일본은 이를 계기로 끈질기게 독도영유권을 주장하고 있습니다.

과거에도 독도영유권 주장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그냥 떼나 써보는 정도였었습니다. 하지만 독도가 중간수역 즉 한일 공동관리수역으로 빠져나가자 법적인 논리적인 근거가 생겼다며 집요하게 물고 늘어지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러더니만 8년 전 부터는 일본 국방백서에 아예 독도는 일본영토라고 명기를 해놨다고 하니, 오늘날 독도 영유권 문제는 김대중 전대통령이 그 빌미를 제공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과거의 전직 대통령이 잘못 저지른 일을 한탄만 하고 있을 수는 없는 일이였기에 이대통령이 직접 팔 걷어부치고 독도를 전격 방문하여 독도는 대한민국 영토임을 만천하에 각인 시켰습니다.

현정부에서 하는 일이면 무조건 반대부터하고 비난하는 이들은 긁어부스럼 만들었다며 일본이 독도를 분쟁지역으로 만들어 국제사법재판을 받게 하려는데 일조했다거나 대일본 카드를 다 써버렸다며 비난을 일삼습니다.도대체 저들은 어느 나라 국민인지 알다가도 모를 일입니다. 대북 이슈에서는 북한 편들고, 대일 이슈에서는 일본 편을 들어주니 어느 나라 국민인지 헷갈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영토문제에서는 단호한 입장이 필요합니다. 다른 나라가 영토를 침탈하겠다는데도 그냥 기회나 엿보고 국제사법재판소에 가면 불리하게 되지나 않을까 염려나 하고 앉아 있어서는, 영토를 보호하려는 의지가 없는 사람으로 봐야 할 것입니다.

독도는 역사적으로도 대한민국 영토라는 역사적 기록물들이 전 세계 여기저기서 쏟아져 나오고, 전쟁이나 물리력으로 영토를 빼앗을 수 없다는 것이 국제적으로 인정하는 법입니다. 패망한 일본이 독도도 되돌려주는 것이 합당하고, 1998년까지는 대한민국의 배타적 경제수역안에 들어 있었습니다. 해방후부터만 치더라도 70여 년 간 실효적 지배를 해왔는데 왜 국제사법재판소에 가면 불리하다고 지레 짐작, 겁부터 먹어왔었는지 지금도 이해하기가 힘듭니다.

역대 대통령들이 국민정서와는 다르게 독도 문제에 대처해 온 것은 솔직하게 말하자면 세계 2위였던 경제대국 일본하고 독도 영유권 가지고 분쟁하다가 지게 되면 역사의 죄인으로 남을까봐서 겁을 먹고 이러저러 핑계를 대왔던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입니다.

이에 반해 이대통령은 단호하게 영토수호 의지를 세계 만방에 보여주었습니다. 한 나라의 대통령이라면 이런 정도의 결단력이 필요합니다. 수 십 년 만에 찾아온 무더위에 많은 사람들이 지치고 힘겨워 하던 차에 이대통령의 독도 방문으로 인해 한 줄기 소나기 같은 시원함을 온 국민들이 느꼈습니다.

그동안 역대 정권들은 반일감정만 앞세워왔었지 시원한 대응을 제대로 해 본 적이 없었습니다. 이번 이대통령의 독도 방문으로 인해 대한민국 국민의 한 사람으로서 자부심이 느껴집니다. 반일(反日)이 아닌 극일(克日)을 해야 한다는 가르침을 보여준 쾌거가 아닐 수 없습니다.

1954년 7월28일 미국 양원합동 의회에서 연설하는 이승만 대통령.

▲1954년 7월28일 미국 양원합동 의회에서 연설하는 이승만 대통령

1954년 이승만 대통령이 세운 독도 등대. 사진은 증축된 현재의 모습, 갈매기들이 아름답다.

▲1954년 이승만 대통령이 세운 독도 등대.
사진은 증축된 현재의 모습, 갈매기들이 아름답다.


북괴와 이해찬, 왜 독도에 유사한 주장?

내 나라 대통령이 내 땅에 간다는데 왜 딴지를!


(이승만 대통령의 평화선-일명 '이승만라인')

 
(김대중때 체결된 한일어업협정시 수역)

親北反日派의 '독도소란'은 '일본돕기'?!

일본의 독도 영유권 주장을 반정부 투쟁에 악용마라

일본은 한국에 너무 야비하다. 정이 많아 수시로 고생하는 한국인들이 식민지 지배를 망각하고 대지진의 재앙을 당한 일본을 진심으로 돕는 가운데, 일본 정부가 또 독도(다케시마) 영유권을 초중고 고교사에 담아 한국인들의 당연한 분노를 사고 있다. 외교에 능한 이승만이 해방 당시 한국령으로 편입시키고 6.25전란 가운데에서도 지켜낸 독도를 김대중이 신한일 어업협정으로 일본에 떠어주었다는 비난이 있는 가운데, 일본은 날이 갈수록 한국을 무시하고 독도를 자신들의 영토로 주장하고 있다. 그것도 한국이 어려움을 겪을 때나 한국이 일본에 호의를 보낼 때에 일본은 야비하게 독도 영유권을 주장하니, 한국인들이 일본을 이해하고 포용하기가 참으로 힘들게 되었다. 일본의 독도에 대한 집착은 어떤 현실적 난관이나 반대에도 불구하고 집요한 것 같다.

그런데 독도를 자기땅이라고 일본이 우기는 근거는 독도가 김대중에 의해 한일 간의 중간수역으로 법적으로 구분되어 있기 때문이라는 주장도 있다. 어떤 정부도 중간수역에 있는 섬을 자기땅이라고 우긴다면, 그것은 좀 이치에 맞지 않는 주장일 것이다. 그런데 외교에 달인이고 대한민국 사랑에 화신인 이승만이 대한민국의 영토로 확정시킨 독도는 기만과 선동에 달인인 김대중에 의해서 국제법적으로 지금 한일 사이에 떠있는 공해상(중간수역)의 무국적 섬처럼 되어있는 상태다. 입만 열면 민족과 민주를 외친 김대중은 노무현이 해양수산부장관 시절에 신한일어업협정을 일본과 맺으면서, 독도를 한국의 배타적 수역의 기점이 아니라 공동수역으로 분류하여, 법적으로 독도를 주인없는 땅으로 포기한 결과를 낳았다는 주장이다.

독도는 이승만 건국대통령이 한국땅으로 쟁취한 섬이다. 이승만 건국대통령의 배짱과 기지로 독도는 한국의 땅으로 확정되었고, 또 지금도 실효적으로 한국이 지배하는 땅이 되게 만들었다. 1952년 1월 대한민국 대통령 이승만은 ‘확정한 국제적 선례에 의거하고 국가의 복지와 방어를 영원히 보장하지 않으면 안 될 요구에 의하여’ 해안에서 50∼100마일에 이르는 해상에 선을 긋고 ‘인접 해양에 대한 주권 선언’했고, 이를 ‘이승만 라인’이라 부르며 철폐를 일본을 비롯해서 미국과 자유중국도 비난했으나, 이승만은 굴하지 않고 오히려 한일 간의 평화를 위한 ‘평화선’으로 부르면서 독도를 우리땅으로 확정했다. 평화선 안에 독도를 포함시킨 이승만이 종북좌익분자들에 의해 끝내 매국노로 매도되면, 독도는 일본땅이 될 것이다.

일본 정부와 어민들이 ‘이승만 라인’을 무시하고 침범하자, 이승만 정부는 함정을 동원해서 ‘평화선’을 넘는 일본 어선들을 나포했고, 1961년까지 나포된 일본 어선은 300척이 넘고 억류된 일본인은 4000명에 가까웠다고 한다.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에서 일본이 포기할 지역에 독도가 포기된 것에 이승만은 '이승만 라인'으로 독도를 우리땅으로 만든 것이다. 독도는 그렇게 종북좌익반일분자들이 매국노라고 욕하는 이승만에 의해 우리땅으로 확정되었고, 사수되었다. 독도는 위대한 국부 이승만이 지켜온 대한민국의 땅이다. 일본의 식민지였던 한국이 6.25전란을 겪으면서까지 실효적으로 지배한 독도가 어떻게 이제와서 일본땅이 될 수 있단 말인가? 하지만 이승만을 무시하는 어리석고 기만적인 통치자가 등장하면, 독도는 일본땅이 될 것이다. 지금도 이승만의 자주와 자유의 기운이 독도를 지키고 있다.

'독도본부'는 '신한일 어업협정- 독도를 일본에 넘기는 조약'이라는 연재물을 2007년에 자신의 홈피에 게재하면서, 1999년 김대중 정권이 일본과 맺은 신한일 어업협정이 독도를 일본에 내어준 매국적 조약이라고 집요하게 비판하고 있다. 실제로 김대중 정권 때 체결한 신한일어업협정에는 대화태 황금어장과 독도가 한일 간의 중간수역으로 구별되었으며, 이로 말미암아 일본은 독도를 자기땅이라고 주장할 수 있는 국제법적 명분을 확보할 수 있었다는 주장도 있다. 독도가 한국땅으로서 배타적 경제수역의 기점으로 인정되지 못한 김대중의 신한일 어업협정은 매국적 요소가 없지 않다. 독도가 한일 간의 중간수역으로 구분됨으로써, 국제사법재판소에 가서 일본은 독도를 분쟁지역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독도에 관한 한, 애국자는 이승만이고 매국노는 김대중이란 주장이다. 적확한 판단이 아닌가?

오늘날 독도 분쟁을 두고 종북좌익분자들이 반일감정을 부추기면서 이명박 정부를 때리는 데에 혈안이 되어 있는데, 이 종북좌익분자들이 진실로 독도 문제에 관심을 두었다먄, '이승만의 독도 지키기'와 '김대중의 독도 버리기'를 깊이 고민해야 할 것이다. 독도를 일본에 국제법적으로 넘겨준 매국적 통치자가 김대중이 아닌지 종북좌익분자들은 반일선동을 할 때에 고려해야 거짓말이 되지 않는다. 독도에 대한 한일 간의 다툼은 결국 국제법적인 문제이고 동시에 실효적 지배의 문제이다. 현재 한국이 독도를 실효적으로 지배하고 있기 때문에, 사실상 한국령이라고 해도 문제가 없다. 하지만, 김대중의 매국적 신한일어업협정으로 인해서, 독도는 법적으로 한국의 배타적 수역이 아니라 한일 간의 중간지역이다. 한국이 법적 소유권을 가지겠나?

이런 한국 내 사정은 차치하고, 일본은 일본에게 가장 잘 대해준 이명박 정부 출범 이후 모두 네 차례에 걸쳐 독도 영유권 주장과 왜곡된 역사를 담은 초중고교 교과서로 한일 관계를 악화시켰다고 동아닷컴이 3월 30일 전했다. 공교롭게도 북괴의 대남 도발로 한국이 힘들 때에 일본은 독도 영유권을 주장했다는 것이다. 동아닷컴은 "영유권을 주장해 독도를 분쟁지역으로 만들기 위해서라면 한국 정부와 국민의 처지는 아랑곳하지 않는다는 반발을 사기에 충분했다"고 일본의 독도에 대한 집착을 지적했다. 대한민국의 정부와 국민들은 일본의 식민지배를 잊고 정신대 할머니들까지 일본의 대지진에 애도를 표하고 지원하는 동정심을 가졌는데, 일본의 독도에 대한 집착은 무자비하다고 비판할 수 있다.

동아닷컴은 2008년 7월 11일 박왕자씨 피격사건 사흘 뒤에 일본 정부는 ‘독도는 일본 영토’라는 내용이 들어간 중학교 학습지도요령 해설서 개정 내용을 발표했다고 지적했다. 또 2009년 4월 5일 북한이 장거리 로켓을 발사한 나흘 뒤에 극우세력들로 이뤄진 ‘새로운 역사교과서를 만드는 모임’이 한일관계사를 왜곡한 지유샤(自由社)의 중학교 역사 교과서를 일본정부가 승인했고, 같은 해 대청해전이 일어난 1개월 뒤인 12월 25일 고교 학습지도요령 해설서 개정안을 발표하여 독도 영유권을 주장했고, 지난해 3월 26일에는 천안함 폭침사건 4일 뒤에 독도 영유권을 주장한 초등학교 교과서 검정 결과를 발표했다고 동아닷컴은 지적했다. 이런 사실들을 고려해서 판단하면, 일본은 독도 문제를 두고 한국에 야비했다. 한국의 종북좌익세력이 일본의 야비함을 악용할 정도로...

그리고 동아닷컴은 "일본이 중학교 새 학습지도요령 해설서에 독도를 일본 고유영토로 표기하기로 했다는 사실이 현지 언론을 통해 처음 알려진 것은 2008년 5월 18일이었다. 당시는 광우병 파동으로 시작된 미국산 쇠고기 수입 반대 시위가 반정부 투쟁으로 확산되던 때였다"며 일본의 독도 영유권 주장의 타이밍에 주목했다. 한국 정부가 북괴의 도발이나 혹은 남한 내 종북좌익세력의 반란으로 힘들어할 때에, 일본이 독도 영유권을 주장하는 것은 우연으로 보기 힘들다는 것이 동아일보의 관찰이다. 이는 우연일 수도 있지만, 일본 정부의 고의적인 전술일 수도 있을 것이다. 일본의 아망스러움과 야비함이 한국이 어려울 때에 고의적으로 독도 영유권을 주장하는 짓을 했을 수도 있을 것이다. 이를 한반도의 망국세력이 자중지란의 자멸극을 벌이는 데에 악용할 줄 알고서???

독도 영유권 문제는 이승만 라인이라는 법적 근거와 우리가 사실상 오랫동안 지배해온 실효적 지배에 의해서 우리가 앞장서서 떠들 문제는 아닌 것 같다. 하지만, 일본이 문제를 걸어오면, 우리로서는 대응하지 않을 수가 없다. 그런데 그 방식은 반일감정을 해소하는 수준의 자위행위여서는 안 될 것이다. 중앙일보는 독도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러시아식 해결방식을 배우라는 논설을 통해 "반일감정을 부추겨서 정치적으로 일시적으로 악용하는 ‘반일 푸닥거리’를 그만두고, 실효적 지배라는 압도적 우월함을 활용하라"는 취지의 해결책을 내놓았다. 즉, 드미트리 메드베데프 대통령이 북방영토를 방문하여 실효적 지배를 과시했듯이, 이명박 대통령도 그런 독도 방문을 주장했다. 우리땅을 우리가 너무 분쟁지역으로 만들면 안 된다. 종북좌익세력의 독도소란 피우기는 깊이 보면 일본을 돕는 짓이다.

이런 중앙일보의 전시적 과시가 얼마나 독도 문제를 잠재우는 데에 효과가 있는지 모른다. 다만 독도를 자기땅(다케시마)이라고 우기는 일본의 치밀한 작업과 선전을 한국의 종북좌익분자들이 남한정부를 때리는 자중지란에 악용하는 것은 막아야 할 것이다. 이승만이 지키고 김대중이 내어준 행적을 가진 독도의 영유권 문제를 놓고 마치 이명박 정부가 친일매국정부라고 닥달하는 해괴한 매국노들의 준동을 우리 정부와 국민들이 제압해야 한다. 독도를 일본에 신한일어업협정으로 중간수역으로 내어준 김대중 정권에 친화적인 종북좌익세력이 일본의 독도 영유권 주장을 빌미로 이승만과 이명박을 친일매국노로 매도하는 정치선동은 부당하고 사특하다. 일본이 일으킨 독도 분쟁이 종북세력의 반정부 투쟁의 소재가 되면 안 된다. 일본의 야비함을 망국에 활용하면서...

일본의 대지진으로 인한 방사능 유출 사고와 일본의 독도영유권 주장을 기폭제로 삼아, 실체적 혹은 역사적 사실도 아닌 정보를 기반으로, 반정부 투쟁에 나서는 친북반일파의 정치선동은 외부에서 당하고 내부에서 투정부리는 찌질이들의 깽판질에 불과하다. 미국산 쇠고기를 핑계로 반란을 일으킨 바로 그 종북세력이 일본의 방사능 물질과 독도 영유권 주장을 계기로 한국 정부에 정치투쟁을 선동한다면, 그것이야 말로 망국노들의 자해, 자위, 자멸 행각일 것이다. 이승만의 배짱과 기지로 독도는 지금 한국의 영토다. 김대중의 우매한 한일협약으로 독도가 중간수역으로 되어있지만, 그래도 독도를 우리가 지배하니, 너무 우리가 자중지란의 소란을 피워, 일본의 전술에 휘말릴 필요는 없다고 본다.

[조영환 편집인: http://allinkorea.net/]




http://www.dokdocenter.org/




독도를 움켜쥔 박정희와 내 준 김대중

5.16후 박정희는 독도측량 지시했다

박정희 전대통령을 음해하는 무리들은 DJ가 일본에 대폭 양보한 영해권을 박정희 전대통령에게 덮어 씌운다

< 박정희>한일협정 대비 영유권 공고화 작업부터

◇ 1962년 10월11일 울릉도를 방문한 박정희 의장을 여학생이 꽃다발로 환영하고 있다. 울릉도 주민들은 국가원수의 최초 방문을 기념하는 순시기념비를 이듬해 울릉읍 저동리에 세웠다.


동해 1번지 울릉도와 독도

“동해물과 백두산이……”

애국가 첫머리가 동해로 시작된다. 동해의 1번지는 울릉도와 독도 형제섬이다. 형제가 이웃해 있지 않고 작은 아우가 수평선 너머로 나아가 고향 바다 들머리를 지키고 있고, 형이 또한 모진 풍랑과 외로움 속에서 그런 아우를 보살피고 지켜왔다. 독도는 그렇게 예로부터 울릉도 사람들이 지켜왔다. 1950년대 홍순칠의 의용수비대가 울릉도를 거점으로 하고 있었고 그후 독도 경비를 울릉도경찰서에서 담당해 왔다.

건국 대통령 이승만 시대로부터 박정희 정부의 근대화 시절까지는 독도의 영유권을 포함한 국토관리 의지가 강력했다. 그랬는데 그 뒤로 경제성장의 가속도로 국력이 커지고 국제사회에서의 위상이 높아졌음에도 일본의 독도 시비에 대한 대응책과 국토수호의 자세는 미덥지 못한 것이었다.

울릉도와 독도는 동해의 1번지로서 대한민국의 해상 관문이라는 자격을 갖추고 있음에도 그런 대접을 받기는커녕 육지로부터 멀리 소외되어 있었다. 일본이 독도를 제 것이라고 집적거리고 염장을 질러댄다고 불끈불끈할 것만도 아니다. 국토관리 임무를 맡은 정치와 행정이 오죽하면 그럴 것이며, 공동체정신이 야무지지 못한 국가사회 구성원 저마다의 무관심이 오죽하면 또 그럴 것인가.

누리꾼들의 화제가 된 ‘독도 담판’ 스토리

일본의 독도 시비에 대한 다양한 의견들이 속출하고 있지만 속 시원한 답이 보이지 않는다. 내 나라 땅을 제 것이라고 우기는 그 입을 재봉틀로 박아 버리고 영유권에 종지부를 찍는 무슨 쾌도난마의 수는 없을까.

요즘 인터넷에서는 5.16혁명의 장군 박정희와 내로라하는 사무라이 기질의 고토 마사유키라는 일본 특사의 ‘독도 담판’ 이야기가 누리꾼들에게 호응을 얻고 있다.
두 장부는 술자리에서 맞붙어 박정희의 일본 육사 선배라고 큰소리를 치는 고토 마사유키가 대가 지불을 조건으로 독도를 흥정하는 수작을 벌인다.

박정희는 쇼와시대 최고의 사무라이를 자칭하는 고토에게 “계집애처럼 앵앵거리지 말라”면서 “나는 목숨 걸고 혁명을 한 사람이다. 나에게 가장 즐거운 일은 조국을 위해 목숨을 바치는 것이다”라고 일갈한다.

고토는 박정희의 서슬에 질려버려 두 손을 들고 마는데, 그때 박정희의 눈빛에서 비장하고도 유쾌한 ‘사나이의 진짜 미학’을 찾았다는 기쁨과 함께 경외심을 품게 된 고토가 뒤에 10.26사건 소식을 접하고는 “OOO같은 조선 놈들”이라며 울부짖었다는 것이다.

독도 문제로 짜증이 나고 부아를 삭이지 못하는 누리꾼들에게 인기를 얻을 만한 드라마틱한 이야기다. 호쾌한 재미가 있고 감동을 주긴 하지만, 이야기의 구도와 설정이 팩트로 보기에는 너무 미흡하다.

첫째는 고토 마사유키가 가져온 독도의 교환조건이다. 그는 일본 제약회사의 기술을 이전해 줄 테니 독도를 달라고 했는데, 흥정 카드로 격이 맞지 않아 설득력이 없다. 일본으로서는 한일협정을 독도 문제를 거론하는 대단한 호기로 보았는데, 국교수립과 청구권자금이 달린 현안에 고작 제약회사 기술 이전이라니.

둘째는 고토 마사유키를 특사로 보내는 주변의 인맥이 드러나지 않아 그가 일본 정부의 의사를 대변하는지, 아니면 그저 독도에 군침을 흘리는 사무라이 소영웅들의 장난인지가 분명하지 않다는 점이다.

박정희가 유서를 써놓고 5.16거사를 한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독도 담판’ 스토리는 그런 박정희의 면모를 그럴 듯하게 포착한 재미있는 ‘메이드 인 재팬’의 픽션으로 치부해 무방할 것이다.

달마가 동쪽으로 간 까닭은

군사정부 시절 박정희의 동선(動線)은 정치의 구심점인 광화문 일대를 멀리 벗어나 지방 곳곳으로 이어지고 있다.

혁명세력에 의해 정치권 밖으로 떨려난 구 정치인들이 광화문 쪽만 바라보며 민정이양을 학수고대하고 있던 1962년 10월, 박정희는 동해안 화진포에서 해병대 상륙작전 훈련을 참관한 후 주문진으로 이동해 돌연 해군 함정을 타고 울릉도로 갔다.

그는 왜 울릉도에 갔을까. 흡사 달마가 동쪽으로 간 까닭을 속세의 중생들이 헤아리지 못하는 것처럼 그가 동해로 간 까닭을 알고 주목하는 구 정치인은 전무했다. 그들은 오로지 광화문으로 다시 진출하는 것만이 소원이었고, 미국이 군사정부에 강도높게 민정이양 압력을 가하거나 아예 혁명세력을 제거해 주기를 두손 모아 빌고 있었다.

후일 외무부장관을 지낸 김동조는 실제로 그해 1962년 9월 워싱턴에 갔더니 국무부 관리들이 한국 군사정부의 민정이양을 당연시하고 약속이 안지켜질 경우 강제 축출을 기정 사실로 여기고 있더라고 증언한 바 있다.

그럼에도 박정희는 아주 태연히 연초부터 서울을 비우고 지방으로만 열심히 돌아다녔다. 그해 1962년은 울산에 처음 공업단지를 기공하면서 제1차 경제개발5개년계획의 힘찬 시동이 걸린 첫해였던 것이다. 정치만을 갈망하는 사람들은 그가 무슨 화두를 붙잡고 그렇게 고행을 하는지 제대로 알지 못했고 알려고도 하지 않았다.

문경시멘트공장 대표(이정림)가 얼굴이 까맣게 타고 깡마른 박정희를 보기가 안됐던지 “용한 한의사가 있으니 보약 좀 지어 드시라”고 했지만, 고기도 먹어본 사람이 먹는다고 보약을 먹어본 적이 없는 그는 보약 체질이 아니라며 거절을 했다.
전국을 돌며 국가경영 구상에 몰두하던 그 시절이라 해도 구태여 울릉도까지 갈 필요가 있었을까. 울릉도 시찰이 과연 얼마나 중요한 일이었을까.


◇ 1962년 10월11일 박정희 의장이 울릉군청에서 보고를 청취하고 나오는 모습. 그는 이날 울릉군수의 관사에서 유숙하면서 섬생활을 체험하고 울릉도 개발과 독도 영유권 강화 문제 등을 구상했다.

◇ 1962년 11월18일 박의장의 초청으로 서울에 온 울릉도 학생들이 장충동 의장공관에서 박의장 내외에게 선물을 드리는 모습.

61년 11월 “독도 지형도를 만들고 토지대장에 등록한 뒤 결과보고하라”

박정희가 울릉도에 간 것이 1962년 10월 11일.

그날 풍랑이 사나워 박정희 일행이 타고 온 해군 함정이 도동항에 접안을 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가랑잎처럼 흔들리는 보트에 몸을 싣고 간신히 상륙했는데, 자칫 잘못되면 큰 변을 당할지도 모르는 긴박한 모험의 순간이었다.

악천후를 헤치고 울릉도를 찾아온 최고지도자를 보고 울릉도 사람들이 깜짝 놀랐음은 말할 것도 없다.

까까머리, 단발머리 학생들이 박수와 꽃다발로 환영하고 모든 주민과 공무원들이 나와 줄줄이 악수를 나누었다.

그때 박정희는 최고회의 의장이자 대통령 권한대행의 신분이었다. 울릉도에 사람이 살고부터 지금까지 울릉도를 방문한 국가 최고지도자는 박정희가 유일하다.

울릉도 사람들과 독도 경비원들은 그해 8월 박정희가 라디오와 담배, 그리고 책을 보내준 것을 잊지 않고 있었다. 특히 울릉도에 10대, 독도에 2대 보내준 국산 라디오는 당시 일반 가정에서 흔히 볼 수 없는 귀중품으로 섬사람들에게 세상과의 단절감을 단숨에 해소시켜준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기쁨이고 위안이었다.

박정희는 울릉군청에서 군수(박창규)로부터 울릉도와 독도에 관한 종합 보고를 듣고, 독도 경비를 담당하고 있는 울릉경찰서 경관들을 위로했다.

그가 가장 주목하는 곳이 독도였다. 그는 일찍이 1961년 11월 “독도를 정확히 측량하여 토지대장에 등록하고 그 결과를 보고하라”는 특별지시를 했었다. 그에 따라 국토건설청 산하 국립건설연구소(국립지리정보원의 전신) 측량팀이 2개월에 걸쳐 독도의 지형을 측량하고 지형도를 작성했는데, 이는 독도의 영유권을 확실히 해두는 국토관리 차원의 작업이었다.

울릉도 방문 이후에도 그는 그곳 학생들을 여러 차례 청와대로 초청해 격려하고, 독도 의용수비대 출신 용사들에게는 훈장을 주어 공적을 기렸으며, 교통사정이 열악한 울릉도에 도로건설 등 종합개발사업을 지시해 건설 경기가 일어나면서 육지와의 왕래가 빈번해졌다.

그리하여 1960년대 중반부터 “울렁울렁 울렁대는 가슴 안고 연락선을 타고 가면 울릉도라”는 신나는 노래가 선풍적인 인기를 끌어 울릉도가 대중에게 가까이 다가온 것도 따지고 보면 ‘해상의 최전방’을 중요시한 통치자의 국토관리 의지와 결코 무관하게 볼 수 없는 것이었다.

65년 6월, 일본 미국의 독도 시비를 셧아웃시키고 이끌어낸 한일협정

그러나 무엇보다 이 ‘해상의 최전방’에 대한 일련의 국토관리 조치들은 한일협정을 대비한 사전 포석이라는 사실이 중요했다.

일본은 국교수립과 청구권자금이라는 한일협정의 대의제 앞에 독도 영유권을 들이밀어 대단한 흥정을 벌일 심산이었다. 돈을 줄 테니 독도를 내놓으라는 것이다.

박정희 정권이 춥고 배고픈 후진국의 설움을 벗어나고자 경제개발5개년계획의 기치를 내걸었지만 문제는 돈이었다. 박정희는 국고(國庫)가 텅 비다시피한 당시의 국가 실정을 “털려도 몇번은 털린 빈 집”이라고 탄식하면서 한일회담에 총력을 집중했다. 경제건설을 위해서는 일본과의 국교를 수립하고 청구권자금을 받아내는 길밖에 없다는 판단이었다.

“언제까지나 미국놈들에게서 밀가루나 얻어먹고 살 수는 없다. 왜놈에게 더 굴욕을 당하면서 살아가지 않기 위해서라도 반드시…….”

이것이 한일회담을 지휘하는 박정희의 본심이었다. 그는 사석에서는 “미국놈” “왜놈”이라는 말을 예사로 했다.

애초부터 일본은 배상문제에 대하여 “한국에 일본 재산을 많이 두고 나왔고, 철도(鐵道)다 뭐다 해서 베풀어준 게 더 많다”며 고자세였다. 한일회담을 서둘지 않겠다는 태도였다.

이에 대해 한국 측은 북한과 중공, 소련이라는 거대한 공산권과 대치하고 있는 한국의 안보가 일본에 직결됨을 지적하고, 그리고 청구권자금은 당연히 받을 것을 요구하는 것이라며 일본의 태도를 비난했다.

한일수교는 미국의 아시아 방위전략을 위한 선결 과제였다. 그러니 일본이 미국의 기대를 저버리고 한일회담을 외면하면서 아시아 반공 전선에 무임승차할 계제가 못되었다.

일본이 회담 테이블에 갖고나온 것이 바로 독도 카드였다. 독도의 지형도를 작성하는 등 ‘해상의 최전방’에 대한 영유권 강화 조치들을 취한 바 있는 박정희 정권은 일본의 독도 영유권 시비에 대해 과거 일본의 침략을 상기시키는 것이라고 경고했다. 지난날 일본이 한국을 식민지화하는 과정에서 가장 먼저 빼앗은 게 독도였기 때문에 독도의 영유권 시비를 침략의 야욕으로 간주하겠다는 의미였다.

독도 문제로 한일회담이 난항을 거듭하자 미국이 중재에 나섰다. 미국은 한일 양국이 독도에 등대를 세워 공동 소유하는 방안을 내놓았으나 박정희는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일축했다. 미국은 다시 독도문제를 다룰 한일 양국의 외무장관 회담을 제의했고, 이것 역시 박정희에 의해 거부당했다.

그럼에도 일본은 한일협정을 기회로 독도에 관한 주장을 기록으로 남기려고 끈질기게 매달렸다. 1965년 6월 협정 문서에 서명을 하는 자리에서까지도 독도 문제를 물고 늘어졌지만 한국측의 거부로 끝내 뜻을 이루지 못했다.

그렇게 박정희의 한국은 일본과, 그리고 사실상 일본 편을 드는 미국을 상대로 한 1대2의 대결에서 독도 시비를 셧아웃시키고 한일협정의 타결을 이끌어냈던 것이다.

독도 시비에 대한 박정희 정부의 대응은 당연하고도 확고한 것이었다. 독도 영유권은 협상의 대상이 아니라는 것이다.

◇ 1966년 4월28일 독도 의용수비대의 청와대 방문 기념촬영. 이들은 박정희 대통령으로부터 홍순칠 대장이 공로훈장을, 대원들이 방위포장을 각각 받았다. 위 사진은 젊은 시절의 홍순칠

큰 역사의 그림을 그리는 지도자를 국민이 만들어내야

독도 시비를 셧아웃시킨 결과보다 더 주목해야 할 것이 영유권 분쟁을 미리 대비하는 유비무환의 국토관리 작업이다.

유비무환은 박정희 시대의 국가경영, 국토관리의 키워드였다. 조선왕조가 임진왜란을 맞아 무방비상태에 놓여 있을 때 전라좌수사 이순신만이 미리 전쟁에 대비한 전략과 전력을 갖추어 왜군을 물리쳤던 유비무환의 정신이 박정희 시대에 부활한 셈이었다.

유비무환은 박정희가 자주 강조하여 유명했고, 또 후일 어느 국회의원이 “박정희 대통령께서는 ‘유비무충’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라고 유비무환의 환(患)을 충(忠)으로 읽어 또 유명해진 말이다.

이명박 정부에 이르러 또다시 일본이 독도 영유권을 시비하자 독도의 ‘독’자도 꺼내지 않던 국회의원들이 때를 만났다는 듯이 독도에 가서 사진을 찍고 난리법석을 피우는 포퓰리즘 정치에는 유비무환의 개념 자체가 존재할 수 없다.

서울 한복판 숭례문을 지키지 못해 불태우면서 독도를 지키겠다는 그들의 사진은 영락없는 ‘유비무충’ 수준으로, 참 볼 만한 국가관리 실종의 코미디 장면이었다.

천박하게 퇴화된 현상을 보노라면 세월이 반드시 생물을 진화시키는 것만은 아닌 모양이다.

박정희 시대에는 국회에서 미래에 대비한 국책사업의 일환으로 <간도영유권관계발췌문서>라는 책자를 발간한 적이 있다. 간도가 우리 땅임을 증명하는 자료를 모아놓은 이 책을 발간하는 데 박정희는 특별예산을 배정해 지원했다. 1975년 9월의 일이다.

간도는 우리 민족의 발상지이며 고구려, 발해를 거쳐 대대로 민족의 역사가 점철된 영토이다. 그런데 조선의 외교권을 빼앗고 한반도 침략의 발판으로 독도를 멋대로 차지해 버린 일본이 만주에 대한 야욕을 채우기 위한 수단으로 1909년 중국과 간도협약을 맺고 간도를 중국에 넘겨버렸었다.

그래서 통일 이후 간도 영유권 문제 발생에 대비해 <간도영유권관계발췌문서> 책자를 발간했다. 30여년 전에 벌써 북방영토였던 간도를 되찾을 구상을 한 것이었다.


그리고 또 박정희는 언젠가 다시 독도 문제가 불거질 것에 대비해 1978년에 독도를 종합연구하는 데 거액의 예산을 지원했다. 그리하여 10여명의 학자들이 7년간의 연구 끝에 독도 영유권에 관한 귀중한 자료들을 수록한 <독도 연구> 책자가 발간되었다. 책자가 나온 것이 1984년 6월, 그가 세상을 하직한 뒤의 일이다.

일본은 한국의 독도뿐 아니라 중국, 러시아와도 쿠릴열도, 조어도(釣魚島)의 영유권 분쟁을 일으켜 왔다. 오로지 미국을 믿고 영토 야욕의 활개를 치고 있지만, 미국도 어디까지나 국익을 위해 일본을 두둔할 뿐이다. 일본에게는 진정한 친구가 없다.

지난 1세기 동안 주변국들을 침략하고 수탈해 온 범죄국가의 야만성과, 강자에게 예의 바르고 한없이 비굴하며 약자에게는 가혹하기 짝이 없는 일본의 교활한 이미지는 쉽게 지워지지 않는 것이다.

프랑스 최초의 여총리 에디트 크레송은 일본을 “약탈자”라고 극렬하게 비난했고, 미국 로체스터기술연구소는 한 보고서에서 일본을 움직이고 있는 계층을 “본받을 것 없는 부도덕한 생물”이라고 매도한 바 있다.

일본은 독도에 대한 야욕을 버리지 않고 있지만, 그러나 역사의 정의는 결코 일본 편이 아니다.

국가 중대 현안에는 국가경영의 최고 책임을 진 통치권자의 몫이 있다. 결단을 요하는 사안이 발생할 때가 있고, 통치권자는 결정적인 시기에 결단을 내리는 리더십을 보여줌으로써 국민의 신뢰를 얻을 수가 있다.

시대가 인물을 만든다고 한다. 그런가 하면 큰 지도자는 시대를 만들어 왔다. 지도자를 잘 만나는 일이 얼마나 중요한지는 역사가 말해주고 있다.

대한민국에는 독도 영유권을 넘어 통일과 북방영토 회복의 꿈을 주는 지도자, 당대의 평가에 연연하지 않고 진정으로 국가와 민족의 미래를 대비하는 큰 역사의 그림을 그리는 지도자가 나와야 한다.

그런 지도자를 그냥 기다릴 것이 아니라 국민이 만들어내야 하겠다.

[출처 : 데일리안 dailian.co.kr ]

 

독도=우리영토임을 입증하는 고증자료

독도를 분쟁지역으로 만들려는 술책에 속지 말아야

일본의 독도 영유권 주장에 대해 감정적으로 대응하기 보다는 역사적인 고증자료를 통해 논리적으로 대응하는 것이 타당하다고 봅니다. 독도연구보존협회가 그동안 모은 역사적 자료 14가지를 소개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1)독도는 서기 512년(신라 지증왕 13년)부터 한국영토였다. 삼국사기 신라본기와 열전, 세종실록지리지(1481년), 신증동국여지승람(1531년) 등에 기록

2)프랑스 지리학자 당빌의 ‘조선왕국전도’, 독도를 한국 영토로 표시(1737년)

3)일본의 고문헌과 일본 고지도도 독도를 한국 영토로 기록하고 있다. 일본 정부가 독도를 일본에서 처음 기록했다고 한 1667년의 일본 고문헌 ‘은주시청합기’도 울릉도와 독도는 고려 영토라 했고, 일본의 실학자 하야시 시헤이가 편찬한 ‘삼국접양지도’에서도 독도는 조선의 것으로 표시되어 있다.

4)17세기말 일본 정부는 독도와 울릉도를 한국 영토로 재확인했다.(1696년)

5)19세기 일본 메이지 정부 공문서에서도 독도와 울릉도를 한국 영토로 확인했다.

6)일본 내무성이 1876년 근대적 일본 지도와 지적도를 작성하면서 울릉도와 독도는 조선영토이고 일본과는 관계없는 땅임을 확인했다.(일본 내무성 자료)

7)일본 최고국가기관인 태정관이 1877년 3월 20일자로 울릉도와 독도가 조선영토임이 명백하다고 재확인 했다.(1877년 4월 9일자 결정문)

8)1898년 대한제국 학부의 대한여지도와 1899년의 대한전도는 독도가 한국 영토임을 명백히 표시하였다.

9)1900년 대한제국 칙령 제41호에 의해 독도를 한국 영토로 세계에 공표하였다.

10)일본이 1905년 독도를 무주지(無主地)라며 일본 영토로 강제 편입했으나 사실이 세계에 알려질 것이 두려워 관보에는 싣지 못했다.

11)연합국이 1946년 1월 독도를 한국에 반환하라는 군령을 발표했다.

12)연합국의 ‘구일본 영토처리에 관한 합의서’(1950년)에 독도는 한국 영토라고 규정되어 있다.

13)연합국의 샌프란시스코 ‘대일본강화조약’에 독도의 명칭이 누락되어 있으나 울릉도의 부속도서이기 때문에 울릉도만 기록되어 있으면 자동으로 포함된 것이다.


14)유엔군 공군도 독도를 한국 영토로 판정하여 독도 상공을 한국방공식별구역안에
포함시키고 있다.(1950. 6)


이외에도 1870년 조선에 파견되었던 일본 외무성 직원이 제출한 보고서 제목이 ‘울릉도와 독도가 조선에 속하게 된 사정’으로 된 것은 일본 정부가 이미 독도는 조성땅임을 알고 있었다는 사실을 입증하는 것이며, 1946년 발표된 일본 대장성 고시 제654호와 1951년 발표된 일본총리부령 제24호도 독도가 일본영토가 아니라는 사실을 확실히 명시하고 있습니다.

이처럼 독도가 대한민국의 영토라는 사실은 일본인들도 이미 인정한 일입니다. 그럼에도 그들이 독도문제를 꺼내 영유권을 주장하고 있는 것은 이 사건을 국제사회에서 공론화하여 분쟁지역으로 삼겠다는 얄팍한 술수입니다. 따라서 일본의 이러한 주장에 대해 강경하게 대처하되 감정에만 치우치지 말고 논리적이고 과학적인 방법으로 대응함으로써 이들의 술책에 말려들지 않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올인 네티즌 논객: http://allinkorea.net/]


독도사랑

독도에 관한 귀한의 의견이나 자료를 올려주세요

List of Articles
번호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 수
54 박정희의 독도.. 김일성의 백두산 관리자 2011.03.20 5153
53 독도는 왜 우리 땅 이지요? 근거가 확실한가요? 1 ㅑㅐㅔ 2011.08.13 3599
52 독도가 한국땅임을 증명하는 카이로 선언 원문 과 원본사진 file Eugene 2011.08.14 4680
51 독도, 동해 관련 Website(대한민국 땅, 동해: Sea of Korea) eugene 2011.08.19 3134
50 독도문제는 일본의 짖에 응하지 않는것이 최선 관리자 2011.08.20 3277
49 독도 가 한국 영토임을 증명하는 역사자료 - yes 2011.09.13 2937
48 일본 교직원 조합이 "독도의 일본땅 표기"를 거부한 이유 file 관리자 2011.11.05 2459
47 동해 표기 바꾸기 서명운동 참여 박윤호 2012.04.22 1859
46 독도의 진실 : 일본지도에 독도는 없다 박윤호 2012.04.22 2476
45 아시아의 평화는 일본의 반성 여부에 COWBOY 2012.06.07 1441
44 일본이 독도를 자기땅이라고 공식화 관리자 2012.07.12 1598
43 독도함- 아시아 최대 상륙함을 보시라 관리자 2012.07.12 1373
42 Dok-do Eugene 2012.07.18 1117
41 독도 분쟁의 원흉 김대중 과 진상 관리자 2012.08.04 1383
40 묵숨바쳐 지켜야 할 땅- 이명박 대통령 방문 관리자 2012.08.10 1102
39 한일전 축구 동메달 골 - 통괘 관리자 2012.08.10 1342
38 경신참변- 민족 수난 관리자 2012.08.13 1399
37 광복 기록사진 관리자 2012.08.13 1183
36 이명박 대통령 독도방문 사진철 관리자 2012.08.16 1241
» 독도를 지킨 대통령 과 내준 대통령 관리자 2012.08.17 1242
Board Pagination Prev 1 2 3 Next
/ 3

COPYRIGHT 2017 PGH. ALL RIGHT RESERVED

Design by LOJE Corp.

sketchbook5, 스케치북5

sketchbook5, 스케치북5

나눔글꼴 설치 안내


이 PC에는 나눔글꼴이 설치되어 있지 않습니다.

이 사이트를 나눔글꼴로 보기 위해서는
나눔글꼴을 설치해야 합니다.

설치 취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