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연방 하원(下院)의 도널드 만줄로 아태(亞太)환경소위 위원장은 미국의 동북아시아 정책에서 영향력이 큰 정치인이다. 그는 한•중•일 3국의 주미 대사관이 매일 동향을 점검해야 하는 중요 인사 리스트의 상위에 올라 있다.
이런 그가 지난 2월 미국과 일본 정부를 동시에 놀라게 하는 발언을 했다. 공식 문서에 동해의 '일본해(Sea of Japan)' 단독 표기 입장을 고수하는 미국 정부의 정책을 비판한 것이다.
"미국은 (동해와 일본해) 어느 쪽으로도 치우쳐서는 안 된다. 적어도 중립적인 입장으로 바꿔야 한다"고 했다. "(미국) 정부가 무슨 근거로 일본해라고 단독 표기하는지 궁금하다"는 말도 했다. 같은 소위의 민주당 간사인 에니 팔레오마베가 의원도 그의 발언에 동의한다는 뜻을 밝혔다.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어떤 사정이 있었기에 미국 하원 아태소위의 지도부 두 명이 한국 정부가 그토록 듣고 싶어하는 발언을 했을까. 이는 우리 정부의 외교력 때문이 아니었다.
만줄로 위원장의 발언은 재미 한인 단체 대표들을 면담하는 자리에서 나왔다. 한인 단체 대표들로부터 '동해' 표기를 바라는 1만2000여명의 서명 서류를 전달받은 후 언급한 것이다. 정치인인 그는 1만명이 넘는 서명인을 무시할 수 없었던 것이다.
재미 한인 단체는 최근 백악관의 온라인 청원 프로그램을 통해 '미국 교과서에 동해 표기를 하자'는 캠페인을 펼쳐 2만5000명 이상의 인터넷 서명을 이끌어내기도 했다. 재미 한인 단체는 이달 중 개최되는 국제수로기구(IHO) 총회에 맞춰 미 국무부와 지명위원회(BGN)도 압박하고 있다.
이런 사례는 최근 실시한 재외국민 선거투표 못지않게 우리 교포들이 발을 붙이고 사는 곳에서 정치 참여가 중요하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것이다. 교포들이 각 국가의 주류사회로 들어가 정치세력화하는 것은 재외국민 선거보다 더 의미 있는 일이 될 수 있다.
이미 그런 가능성은 2007년 일본 정부의 강력한 저지에도 미 연방 하원에서 일본군 성노예(위안부) 결의안이 채택되도록 함으로써 보여준 바 있다. 지난해에는 6•25전쟁 납북자 결의안이 미 하원에서 통과되기도 했다. 최근 미국 버지니아와 메릴랜드주(州) 의회를 중심으로 교과서에 동해를 병기하도록 하자는 논의가 활성화된 것도 이 지역 한인 단체들의 노력 덕분이다.
외교통상부 산하 재외동포재단의 홈페이지 초기 화면을 보면 전체 해외 동포는 이달 현재 726만7000명이다. 싱가포르 인구를 넘어서는 규모의 '코리안 디아스포라(Diaspora•전 세계에 흩어져 사는 동포)'가 지구 곳곳에서 활동하고 있다.
이번 재외 국민 선거에 들어간 293억원의 일부라도 이들이 살고 있는 나라의 정치권에 대한 발언권을 확보하는 데 전략적으로 쓰인다면 우리가 정말 필요할 때 도움을 받을 수 있다. 일부 국가에서 우리 교포들이 겪고 있는 부당한 대우도 사라질 것이다.
실제 투표율이 2.5%에 그친 재외 국민 선거의 개선책을 논의할 때 과연 어떤 정책이 이들이 자부심을 갖도록 하고, 코리아 브랜드를 높이는 길인지도 따져봐야 한다.
출처: 조선일보 (4/15/20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