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kip to content

조국 사랑 미주연합

조회 수 2531 추천 수 0 댓글 0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수정 삭제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수정 삭제

고대의 기록

중국사서인 위지 왜인전에 대마도가 일국으로 등장한다.

중국사서인 위지왜인전(魏志』倭人伝)에 대마도 일국(一國:하나의 국가)으로 등장한다. 대방군(204~313년간 조선반도에 존재했던 중국고대 지방거점)에서 야마타이구니(邪馬台国:3c경 일본에 존재했던 나라)에 이르는 중간에 구사한국(狗邪韓国:경남 김해)에 관한 기록에 의하면 대마는 「바다를 건너 일천리」의 남쪽에 위치한 곳에 야마타이 꾸니(邪馬台国)에 복속한 30여 개국 중(30여개의 섬으로 이루어 진 나라/일본 야마토 정권을 이름)의 일국(一國)이었다 하고 그곳(대마)은 사는 곳이 절영으로 토지는 산이 험하고 깊은 숲이 많고, 길은 짐승이 다니는 길과 같이 좁고 험하고 천여호의 가옥이 있으나 토지는 양전이 없고 해산물을 채집하여 산다. 배로 남북으로 교역하면서 산다고 기록되어 있다.

우리나라의 최초 대마에 관한 기록은 삼국사기에 나타난다. 

신라 제18대 실성 이사금 (實聖尼師今  402~417  재위기간 15년) 7년(409) 봄 2월, 왕은, 왜인이 대마도에 병영을 설치하고 병기와 군량을 저축하여 우리나라를 습격하려 한다는 말을 듣고, 그들이 공격해오기 전에 먼저 정병을 뽑아 그들의 군사 시설을 공격하고자 하였다. 서불한 미사품이 말했다.

"저는 '병기란 흉물스런 도구요, 전쟁이란 위험한 일이다'라고 들었습니다. 황차 큰 바다를 건너 타국을 공격하는 것이야말로 이보다 더할 것입니다. 만일 실패한다면 후회해도 소용없을 것이니, 차라리 험난한 지형을 찾아 요새를 설치하였다가, 적이 올 때 이를 막아 침범하지 못하게 하고, 우리에게 유리할 때 나가서 사로잡는 것이 나을 것입니다. 이것이 소위 '내가 남을 끌어당길지언정 남에게 끌려 다니지 않아야 한다.'는 것이니 책략 중에는 상책입니다."왕이 이 의견을 따랐다.

또한 대마에 대하여 기술하기를 고대 신라에서 일본으로는 540년에서 929년까지 89회 입조하였고, 일본에서 신라로는 571녀부터 882년까지 45회에 걸쳐 사절(견신라사)를 파견하였는데 모두 대마를 경유했다고 적고 있다.

813년 대마(対馬)에는 신라어(新羅語)의 통역을 두었고, 894년에는 신라의 대소선100척과 약 2,500인이 좌수포(佐須浦/사스라우/현 대마시)를 습격한 사건이 있었다.

1019년 정체불명의 선박 50척이 대마를 습격했다. 기록에는 피해자가 365명이고, 납치된 자가 1,289명으로 유명한 대마은광(対馬銀鉱)도 소실되었다. 이것은 노예삼기를 목적으로 일본인을 약탈한 것이다. 피해는 대마뿐 아니고 이키(壱岐) 북구주(北九州)까지 미쳤다. 후에 이들의 정체가 도이(刀伊:여진족/女真族)족으로 판명되었다. 여진족은 이 때 대마의 판관 대장영제근(判官代長嶺諸近:長嶺 諸近 生没年不詳. 平安時代의 対馬国의 役人)과 그 일족을 포로로 하여 갔다. 제근(諸近)은 혼자 도망쳤으나 처자를 찾기 위해 고려로 다시 건너가 일본인 포로의 비참한 정황을 살피고 돌아왔다는 기록이 있다. 그 조사내용은 조선을 1차 거쳐 대마로 건너 간 도이(여진족)족이 다시 조선으로 올 것을 미리 대비하고 있던 조선은 이들이 과연 돌아오니 일격에 격퇴하고 대마인을 구조하였다. 구조된 일본인은 일본으로 돌아갔으나 당시 도해가 불법이었던 일본은 제근(諸近)을 구금 형에 처했다.

고려사에서 대마와의 관계에 대한 기록은 많다. 몇 가지만 보면 다음과 같다.

제11대 문종 (文宗 1046~1083 재위37년)기축 3년(1049)무오에 동남해 선병도부서사가 주하기를 「일본 대마도관이 수령 명임 등을 보내어 우리나라의 표풍인 김효 등 20인을 압송하여 금주에 이르렀습니다.」고 하니 명임 등에게 예물을 사하되 차등 있게 하였다. 12월 기미 삭에 글단이 전중소감 마우를 보내와 생신을 축하하였다.

제11대 문종 (文宗 1046~1083 재위37년)신묘 5년(1051)5월 기미에 일본 대마도가 사인을 보내어 피죄도인 양한 등 30인을 합환하였다.

제11대 문종 (文宗 1046~1083 재위37년)경자 14년(1060) 계축에 동남해 선병도부서가 주하기를「대마도에서 우리 표풍인 예성강 백성 위효남을 돌려보내 왔습니다」고 하니 왕이 그 사자에게 예물을 후하게 사하였다.

제13대 선종(宣宗 1083~1094 재위11년)정묘 4년(1087) 경오에 동남도도부서가 주하기를「일본국 대마도의 원평 등 40인이 와서 진주 수은 보도 우마를 바쳤습니다.」고 하였다.

제13대 선종(宣宗 1083~1094 재위11년) 을축 2년(1085/선종2년) 정축에 대마도 구당관이 사자를 보내어 감귤을 받쳤다(丁丑 對馬島勾當官 遣使 進柑橘)

*제주도의 성주(星主)를 '탐라구당사'(耽羅勾當使)로, 일기도(壹岐島 : 대마도와 구슈 섬 사이에 있는 이키 섬) 도주(島主)를 일기도구당관(壹岐島勾當官)이라고 명명한 것에서 대마도주에게 고려의 관직인 구당관을 내린 것을 문서로 확인 할 수 있다.

제13대 선종(宣宗 1083~1094 재위11년)정묘 4년(1087) 경오에 동남도도부서가 주하기를「일본국 대마도의 원평 등 40인이 와서 진주 수은 보도 우마를 바쳤습니다.」고 하였다.

제31대공민왕(恭愍王,1351~1374)기묘에 대마도 만호가 사자를 보내와 토물을 바쳤다.

십일월 병오에 대마도 만호 숭종경 사자를 보내와 조견하거늘 종경에게 미 일천석을 사하였다

 

중세의 기록

일본의 기록을 보면 대마를 오랫동안 일본영토로 표기하고 있다.

「고사기(古事記)」의 건국신화에는 최초에 생성된 섬들「대팔주(大八洲)」의 하나로 「津島진도)」로 기록하였다. 『일본서기(日本書紀)』의 나라탄생 신화에는 「대마주(対馬洲)」「대마도(対馬島)」로 표기하여 등장했다. 예부터 대륙과의 교류가 있었고 역사적으로는 조선반도와 왜인 야마토(일본 최초의 통일정권으로, 3세기 말에서 645년 6월 다이카개신[大化改新]이 일어날 때까지 일본을 지배한 일본의 정권)를 잇는 교통의 요충지였다.

『선대구사본대(先代旧事本紀)』의 「국조본기(国造本紀)」에는 「진도현직(津島県直」이라고 전하다. 고분시대에는 야마토 왕권이 종종 조선반도의 신라에 출병하여 교전을 반복하였는데 이 상항을 일본서기에 기술하고 있다. 이 중 대마의 구체적 지명이 등장한 것은 일본서기에서 대마북단의 와니노쓰(현재의 대마정 鰐浦)에서 출항한 신공황후가 이끄는 대군이 신라를 공격하여 굴복시키고 둔창을 설치했다는 기록이 있다. 황후가 삼한정벌의 귀도에 화다도미신사(현 해신신사)를 지었다하고 이 신사가 대마국의 일궁(一宮)이라고 전한다.

663년 백촌강(白村江)의 전투이후 왜구는 당(唐), 신라(新羅)의 침공에 대비 664년에는 대마에 방인(防人:방어군인)이 설치되었다. 봉화(烽火)가 8개소에 설치되었다. 방인(防人:방어군인)은 대부분 동국(東国:구주 등)에서 징발하였다. 674년에는 엄원(厳原:이즈하라, 쓰시마(對馬) 섬의 남쪽에 있는 도시)이 정식국부(正式国府)의 땅으로 정해지고 동년 대마국사수인 인해조대국(対馬国司守의 忍海造大国)이 대마에서 출산되는 은을 야마토 조정에 헌납했다.

813년에는 대마 신라어의 통역을 두었다. 894년에는 신라의 선박 대소선100척 약 25,000인이 좌수포(佐須浦/사스라우)를 내습하였으나 격퇴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1019년 도이(刀伊/女真族)의 습격을 받았다<구체적 내용은 위에서 밝혀 생략>.

일본의 문영의 역(文永의 役)이란 기록에서 가마쿠라(鎌倉)시대의 일본은 2번에 걸쳐 원과 고려에 의한 침공을 받았다. 대마는 그 최초의 공격목표가 되었고 사상최대의 수난을 받았다. 1274년 몽고병 25,000인, 고려병 8,000인과 수부 6,700명은 고려가 건조한 전함 900척에 분승하고 10월 5일 좌수포(현 대마시)로 쇄도했다. 이 대군에 대항하여 종조국(宗助国:대마도주)은 일족 80여기를 이끌고 과감히 맞아 싸웠으나 압도적 병력차로 전원이 전사했다. 일본기록인『일연성인주화찬(日蓮聖人註画讃)』에 의하면 상륙한 몽고군과 고려군은 남자는 죽이고 여자는 포로로 하여 한곳에 모아 손에 구멍을 뚫고 가죽 띠로 엮어 연결하여 배에 매달아 갔다고 전한다. 이것을 문영의 역(文永의 役)이라 한다<그림-1.2>.

또한 일본기록인 『일연성인주화찬(日蓮聖人註画讃)』에 의화면 1281년에 몽고와 고려는 2번째로 일본을 침공하였다. 원, 고려군은 합포(지금의 마산시)에서 몽고군 15,000명, 고려 병 10,000명 수부 등 17,000명으로 구성하여 동로군으로 하고, 영파(寧波:중국 저장성[浙江省] 닝보시[寧波市])에서 침공한 구남송병(旧南宋兵)100,000명을 주체로 강남군으로 하여 일본을 침공했다. 일본의 『팔번우동기(八幡愚童記)』정응본(正應本)에는 그 중 고려의 병선 450척은 이키(壱岐), 대마(対馬)로 상륙하여 보이는 대로 때려 죽이려하니 국민들에게 미리 알려 처자를 데리고 심산으로 도망가게 하였는데 아기울음소리를 듣고 찾아와서 포로로 했다. 라고 기록하고 특히 고려병의 잔학성이 상세히 전해지고 있다<려몽군과 일본군의 전투는 별도로 기술하기로 함><그림-3>.

 

그림-1『日蓮聖人註画賛』에 나타난 그림(원과 고려의 내습(1274년 몽고군이 일본을 습격하여 대마(対馬), 이키(壱岐), 축전(筑前), 비전(肥前)에 큰 피해를 주었다는 기록과 몽고와 고려연합군과 맞서 싸우는 일본병)

 

그림-2. 1274년 1차 전쟁(일본의 『蒙古襲来絵詞』에 나타난 文永의 役 때 鳥飼潟의 전투장면


 

그림-3. 1281년 2차 전쟁((일본의 『蒙古襲来絵詞』에 나타난 전투장면)

* 일본은 이 기록을 지금 들고 나와 고려인의 잔악상을 성토하면서 근세 일본의 잔인함을 상쇠 시키려하는 의도를 보인다.

고려이후 조선실록에 남이 있는 대마에 관한 기록

1366년 고려왕조가 왜구와 해구의 문책을 종씨(대마도)에게 요청하니 종경무(宗経茂)는 이것에 응하여 고려와 통교가 시작되었다. 1389년 경상도 원수 박위(朴葳)가 이끄는 고려군이 격화되어 가는 왜구를 토벌하기 위하여 대마를 습격했다. 박위(朴葳)는 왜구선(倭寇船)300여척을 격파하고 포로가 된 다수의 고려인을 구출하였다. 왜구의 활동은 고려왕조가 멸망하는 하나의 원인이 되기도 했다. 조선왕조의 시조인 이성계도 왜구토벌에 공명을 세운 사람 중에 하나다.

정종 1년(1399 기묘 / 명 건문(建文) 1년) 7월 1일(기사) 기사에서 대마도 도총관 종정무가 사신을 보내 방물 등을 바치며 왜구의 근절을 맹서하다. 일본국(日本國) 대마도(對馬島) 도총관(都摠管) 종정무(宗貞茂)가 사자를 보내어 방물(方物)과 말 9필을 바쳤다. 그 글은 이러하였다. “배신(陪臣) 형부 시랑(刑部侍郞) 종정무(宗貞茂)는 정승(政丞) 각하(閣下)에게 삼가 글을 올립니다. 오래도록 덕화(德化)를 앙모하였으나 첨배(瞻拜)할 길이 없었습니다. 50년 전에 우리 할아비가 일찍이 이 땅의 장관(長官)이 되었는데, 말하기를, ‘감히 귀국의 큰 은혜를 저버릴 뜻이 없다.’고 하였습니다. 그 뒤에 관차(官差)50) 와 혹리(酷吏)로서 탐욕스런 마음을 방자히 하여 좌우(左右)에서 죄를 얻은 자가 어찌 부월(斧鉞)의 베임을 면하였겠습니까? [日本國對馬島都摠管宗貞茂遣使來獻方物及馬六匹。 其書曰:陪臣刑部侍郞宗貞茂拜書政丞閣下。 久仰德化, 無由瞻拜。 五十年前, 吾祖曾爲此地之宰, 曰: “不敢有負貴國鴻恩之意。” 爾後官差酷吏, 專縱貪婪之心, 獲罪於左右者, 豈免鈇鉞之誅乎?<그림-4> ]

 

그림-4. 일본국 대마도로 표시한 실록의 내용


조선 정종 1년(1399) 9월 10일(정축) 기사에서 일본 대마도 총관 종정무의 사신으로 온 중들이 예궐하여 배사하였다. 일본(日本) 대마도(對馬島) 총관(摠管) 종정무(宗貞茂)의 사승(使僧) 등이 예궐(詣闕)하여 배사(拜辭)하니, 각각 흑마포(黑麻布) 3필, 백저포(白苧布) 3필, 호피(虎皮) 1영(領)을 하사하였다.

세종 26년(1444) 4월 30일(기유)기사에서 초무관 강권선이 일기도에서 돌아와 대마도·일기도·상송포 등지의 사람을 후하게 대하여 순종하고 복종하게 할 것을 아뢰다. 초무관(招撫官) 강권선(康勸善)이 일기도(一岐島)에서 돌아와 아뢰기를, 조선 태종은 1419년 6월 왜구토벌을 대의명분으로 토벌군을 결의하였다. 조선군은 병선227척, 군병17,285명으로 대마를 내습하여 오사키라우(尾崎浦)를 불태우고 작은 배들을 공격하여 인위포(仁位浦)로 나아가서 여가악(如加岳:糠嶽)에서 격렬한 전투가 벌어졌다. 대마 측의 화평제안을 받아들어 7월 3일 거제도로 퇴각했다. 이것을 조선은 을해동정(乙亥東征)이러 부른다.

태종이후 세종은 일본과 선린정책을 취하여 3번에 걸쳐 통신사를 보내 교통의 제도를 장비했다. 1438년 문인제(文引制:조선 시대, 우리나라에 오는 왜인 사절(使節) 등에게 쓰시마 섬(對馬島)의 도주(島主)가 발행하던 도항(渡航) 증명서)를 채용하고, 1443년에는 계해약정을 맺었다. 계해약정에는 대마에서 조선으로 세견선(歳遣船)은 매년 50척으로 제한하고 대신 세사미(歳賜米)200석을 조선에서 지급하기로 했다. 일본에서 조선으로 도항하는 자는 종씨(宗氏)의 통제 하에 두게 했다. 조선남부해역의 어업특권도 종씨(宗氏)에게 주었다. 이리하여 조선과의 교통에 관계하는 특권은 종씨(宗氏)에게 집중되었다. 도내(島内)의 제 호족도 경제적 기반은 토지에 의한 수입보다도 교역에 의한 경우가 더욱 컸다. 종씨(宗氏)가 쥐고 있는 무역권 어업권은 가신단 편성 등에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되었다.

*조선으로 오는 무역선까지 대마도의 도주의 허가를 받게 하여 무역의 주도권을 대마도에게 넘긴 것은 지금 생각하면 참으로 안타가운 일이다.

세종 104권, 26년(1444 갑자 / 명 정통(正統) 9년) 4월 30일(기유)기사에서 권선(勸善)이 또 아뢰기를, “대내전(大內殿:조선 시대 우리나라에 사신을 보내오던 일본 호족의 하나. 14세기 중엽부터 일본의 큐슈[九州] 동북부와 치코쿠[中國] 남부에서 세력을 떨침) 관반(館伴:고려 시대에 외국 사신의 접대와 향응을 담당하던 관직으로) 노라가도로(盧羅加都老)가 말하기를, ‘대마도는 본래 조선의 목마지(牧馬地)이므로, 대내전도 조선과 더불어 협공(夾攻)하여 대마도를 조선에 돌리고자 하였더니 불행하게도 세상을 떠났는데, 지금의 대내전은 이 사실을 알지 못한다. ’고 하였습니다.”

세종 116권, 29년(1447 정묘 / 명 정통(正統) 12년) 5월 26일(병진) 기사에서 임금이 또 말하기를, “당초 고초도(孤草島:조선왕조실록 세종 5년에 고도(孤島)에 관한 기록과 세종 6년에 고초도(孤草島)에 관한 기록이 처음 나타난다. /거문도를 말함)에서 왜인(倭人)이 고기 낚는 것을 허가할 때에 의논이 여러 가지였다가 마침내 왜인(倭人)에게 허가하기로 결정하였는데, 그 세납을 바치기로 약정한 것은 국용(國用)에 충당하려 함이 아니라, 대마도(對馬島) 한 섬[一島]도 옛날 문적에 우리나라의 말 기르는[牧馬] 땅으로 실려 있고, 왜인도 또 본래 우리 나라의 섬이라고 일러 왔는데, 그러나 그 섬이 종말에는 도적이 차지하게 된 것이다. 이제 고초도(孤草島)도 아주 허가하고 돌아보지 아니한다면 뒷날에 대마도와 같이 될는지 어찌 알겠는가.

세조 3년(1457년) 3월 15일 근정전에 나아가 조하를 받았다. 일본 국왕의 사자인 중 전밀・영숭 등 9인과 대내전 다다량 교홍의 사자인 중 덕모 등 14인이 반열에 오르고, 이어서 토산물을 바쳤다. ; 御勤政殿受朝賀 日本國王使者 僧全密永崇等九人 大內殿多多良敎弘使者 僧德模等十四人隨班 仍獻土物 [세조실록 권제7, 9장 뒤쪽, 세조 3년 3월 15일(무인)]

1510년 조선왕조의 무역억제정책과 조선재류 일본인에 대한 제제를 참지 못하고 일본인 거류민과 대마도종씨(宗氏)는 부산포(富山浦:부산 왜관), 내이포(乃而浦:경남 진해), 염포(塩浦:울산 염포동)에서 병란을 일으켰다. 매마도주의 아들 종성홍(宗盛弘)을 대장으로 한 4,000명에서 5,000명에 달하는 군세는 조선 군세에 대패하고 성홍(宗盛弘)은 전사했다. 이것이 삼포의 난(「三浦의 乱」)이다.

신증동국여지승람 제23권경상도(慶尙道) 에 동래현(東萊縣)에 대하여 <전략>대마도(對馬島) 곧, 일본의 대마주(對馬州)이다. 옛날엔 우리 신라[鷄林]에 예속되었었는데, 어느 때부터 일본 사람들이 살게 되었는지는 모르겠다. 부산포(釜山浦)의 도유삭(都由朔)으로부터 대마도의 선월포(船越浦)까지 수로가 대략 6백 70리쯤 된다. 섬은 8군으로 나뉘고 인가는 모든 해안에 인접해 있다. 남북의 길이는 3일 정도, 동서의 길이는 하루, 혹은 반나절 정도의 거리이다. 4면이 모두 돌산이기 때문에 땅은 메마르고 백성은 빈한하며, 소금을 굽고 고기를 잡아다 파는 것을 생업으로 한다.

*이상에서 고대와 중세의 기록을 살펴보았으나 대마도가 조선 령이라고 밝힌 기록은 없다. 고대 3세기경 사기에는 일본의 야마타이구니(일본)에 속한 일국으로 기록되어 있다. 대마는 고려와 조선에 의하여 멸망 성쇠를 맞이하기는 했으나 조선 령으로 기록된 바는 없다. 조선 령으로 기록된 사실이 있는지 알고 싶다.

대마(対馬)에 대하여 영유권주장의 역사적 사실

조선이 왜구로 고민할 때 조선 세종은 종정성(宗貞盛:対馬의 守護大名)앞으로 보낸 서간에서[대마의 섬은 경상도의 계림에 속한다. 본시 우리나라의 땅이다. 기록된 문적이 있다. 이점을 잘 알아야 할 것이다]라고 기록하였는데 2년 후 대마에서 조산으로 파견된 사자는 [본도(대마)는 본 대국(조선)의 목마(말을 기르는 장소)입니다] 하는 답장을 보냈다.<(『朝鮮世宗実録』元年7月庚申条와 3年4月己亥条)>

*일본은 이에 대하여 “이 회답은 사자로 위장한 사람의 소행으로 간주한다. 이것이 15C 대마 사람들이 조선으로 귀속의식이 있었다는 증거는 되지 못한다. 이는 조선 측이 이러한 마도관을 당시 왜구진압에 보여준 강경책의 배경으로 생각할 수 는 있다고 표현하고 있다.

세종 26년(1444) 4월 30일(기유)기사에서 권선(勸善)이 또 아뢰기를, “대내전(大內殿:조선 시대 우리나라에 사신을 보내오던 일본 호족의 하나. 14세기 중엽부터 일본의 큐슈[九州] 동북부와 치코쿠[中國] 남부에서 세력을 떨침) 관반(館伴:고려 시대에 외국 사신의 접대와 향응을 담당하던 관직으로) 노라가도로(盧羅加都老)가 말하기를, ‘대마도는 본래 조선의 목마지(牧馬地)이므로, 대내전도 조선과 더불어 협공(夾攻)하여 대마도를 조선에 돌리고자 하였더니 불행하게도 세상을 떠났는데, 지금의 대내전은 이 사실을 알지 못한다. ’고 하였습니다.”

세종 29년(1447 5월 26일(병진) 기사에서 임금이 또 말하기를, “당초 고초도(孤草島:조선왕조실록 세종 5년에 고도(孤島)에 관한 기록과 세종 6년에 고초도(孤草島)에 관한 기록이 처음 나타난다/거문도를 말하는 것으로 보인다)에서 왜인(倭人)이 고기 낚는 것을 허가할 때에 의논이 여러 가지였다가 마침내 왜인(倭人)에게 허가하기로 결정하였는데, 그 세납을 바치기로 약정한 것은 국용(國用)에 충당하려 함이 아니라, 대마도(對馬島) 한 섬[一島]도 옛날 문적에 우리나라의 말 기르는[牧馬] 땅으로 실려 있고, 왜인도 또 본래 우리 나라의 섬이라고 일러 왔는데, 그러나 그 섬이 종말에는 도적이 차지하게 된 것이다. 이제 고초도(孤草島:거문도)도 아주 허가하고 돌아보지 아니한다면 뒷날에 대마도와 같이 될는지 어찌 알겠는가. 그런 까닭으로 이미 고기 낚는 것을 허락하여서 은혜를 베푸는 뜻을 보이고서 또 세금을 바치게 함으로써 우리나라의 땅임을 명확하게 하려는 것인데, 고기 낚기를 허가한 이후부터 약속 어긴 자를 수색하려 한 지가 10여 년이 되도록 지금까지 하지 못하였다.<중략> “이제 종정성(宗貞盛:対馬의 守護大名)이 지성으로 귀순(歸順)하니, 고초도(孤草島:거문도)에 수색 체포하는 것은 불가 하옵고, 만일 약속을 위반하는 자가 있거든 다시 사람을 보내어 탐문해 본 연후에 형편을 보아서 하기로 하고, 우선 수색 체포하는 것을 멈춘다는 뜻을 일러줌이 역시 무방할 듯하옵니다.”

신증동국여지승람 제23권경상도(慶尙道) 동래현(東萊縣)에  대마도(對馬島) 곧, 일본의 대마주(對馬州)이다. 옛날엔 우리 신라[鷄林]에 예속되었었는데, 어느 때부터 일본 사람들이 살게 되었는지는 모르겠다. 부산포(釜山浦)의 도유삭(都由朔)으로부터 대마도의 선월포(船越浦)까지 수로가 대략 6백 70리쯤 된다. 섬은 8군으로 나뉘고 인가는 모든 해안에 인접해 있다. 남북의 길이는 3일 정도, 동서의 길이는 하루, 혹은 반나절 정도의 거리이다. 4면이 모두 돌산이기 때문에 땅은 메마르고 백성은 빈한하며, 소금을 굽고 고기를 잡아다 파는 것을 생업으로 한다. <중략>군수 이하 토관(土官)들은 모두 도주가 임명하며, 역시 세습이다. <중략> 그 남쪽엔 또 일기도(一岐島)가 있는데, 선월포까지의 거리는 48리 이며, 일기도(一岐島)에서 박다도(博多島)를 경유하여 적간관(赤間關)까지는 또 68리 이니, 적간관이란 일본의 서해안이다<그림-7>.

신숙주의 『해동제국기(海東諸国紀)』(1471년)는 일본국대마도의 지도를 게재했다. 본문에서 대마도를 「일본국서해도(日本国西海道)에 속함」으로 기술하고 도내의 사정을 상술했다. 16C에 간행한 조선의 지리서 『신중동국여지승람(新増東国輿地勝覧)』의 「팔도총도(八道総図)」에는 대마가 명확히 기술되어 있지 않고 조선에 근접하여 그려져 있다<그림-5.6>.

*일본은 이 내용에 대하여 조선의 지도에는 인접하는 영토 외 지역도 함께 그려져 있다. 북방국경인 압록강, 두만강북측에 있는 명의 영토가 이 지도 내에 그려져 있고 대마도 그려져 있다. 이 영토 외 지역을 현대 한국에서는 「팔도총도(八道総図)」에 대마가 본토에 가깝게 그려져 있는 것은 대마가 조선 령임으로 가깝게 그려진 것이라고 해석하고 이것을 근거로 대마는 조선 령이었다고 주장한다.

대마는 우리 땅이라고 주장할 만한 충분한 근거를 찾기 어렵다.

신라18대 이사금(409년)에 대마의 기록이 나타난다. 이 기록에도 왜인이 대마도에 병영을 설치한다고 했다. 813년에 대마에 신라통역을 두었다는 기록이 있어 당시 신라교역이 동남아에 미친 역할을 비추어 알 수 있다. 물론 장보고의 역할이 컸으리라 본다. 고려 13대 선종2년(1085년)에 대마도에 구당관을 두었다는 내용은 놀랍다. 당시 탐라와  일기도(一岐島)에도 고려의 관직인 구당관을 두었다고 하는 기록은 우리에게 큰 희망을 준다. 또한 조선 세종 때(1444년)에는 대마의 대내전 관반인 노라가도로는 대마가 조선 령이라고 밝힌 것은 큰 위안이 된다.

 

그러나 세종은 일본과 선린정책을 취하여 3번에 걸쳐 통신사를 보내 교통의 제도를 장비했다. 1438년에는 문인제(文引制)를 채용하고, 1443년에는 계해약정을 맺었던 것은 국내 출입국관리를 대마에 일임하는 결과를 초래하였다. 이는 사람의 출입과 무역선의 출입을 대마도주에게 위임한 것과 같았다.

 

일본은 고사기, 일본사기, 국조본기, 일연성인주화찬 등의 기록에서 전설적인 이야기에서 기록된 문서까지를 잘 활용하여 역사를 잘 정리해 둔 느낌이 든다.

 

우리는 삼국사기나 고려사. 조선실록, 고지도에도 조선 땅이라고 주장하기에는 미진한 내용이 있다.

 

 

그림-5.해동제국전도/신숙주( 海東諸国全図/申叔舟)

 

그림-6. 대마도지도(日本国対馬嶋図(申叔舟『海東諸国紀』(1471年)「日本国対馬嶋図)

 

 

그림-7. 신증동국여지승람 제23권경상도(慶尙道) 동래현(東萊縣)중에 나오는 대마도:대마도즉일본국대마주야(對馬島卽日本國對馬州也)


독도사랑

독도에 관한 귀한의 의견이나 자료를 올려주세요

List of Articles
번호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 수
» 대마도에 관한 고대 문헌기록 관리자 2012.09.04 2531
33 대마도 간도도 우리 땅 YES ! 2012.09.04 2047
32 우리해군은 왜 제주기지를 원하는가? 애국 2012.09.02 2198
31 일본 강점기의 이승만 COWBOY 2012.09.02 2264
30 일본과 친일파가 음모한 대한제국의 진실 YES ! 2012.09.02 2189
29 요시다 목사 - 일왕 사과 요구 당연 YES ! 2012.08.31 2214
28 대마도 도 우리땅 - 조선족이 주민 YES ! 2012.08.31 1872
27 일본 시위대가 한인 폭행- 독도 폭력 YES ! 2012.08.31 1936
26 미 연방의원의 동해-일본해 표기 주장 YES ! 2012.08.26 1900
25 GoGo -DOKDO Performance COWBOY 2012.08.24 1781
24 대마도는 한국땅-일본이 고증 1 file COWBOY 2012.08.24 2338
23 일제가 강매한 주미 대한제국 공사관 매입 성공 COWBOY 2012.08.24 1350
22 독도 ICJ 제소 어불성설-- 일인 호사카 교수 관리자 2012.08.20 1161
21 국제재판소에 한국동의없이 일본혼자 제소 못해 관리자 2012.08.17 1126
20 독도를 지킨 대통령 과 내준 대통령 관리자 2012.08.17 1242
19 이명박 대통령 독도방문 사진철 관리자 2012.08.16 1241
18 광복 기록사진 관리자 2012.08.13 1183
17 경신참변- 민족 수난 관리자 2012.08.13 1399
16 한일전 축구 동메달 골 - 통괘 관리자 2012.08.10 1342
15 묵숨바쳐 지켜야 할 땅- 이명박 대통령 방문 관리자 2012.08.10 1102
Board Pagination Prev 1 2 3 Next
/ 3

COPYRIGHT 2017 PGH. ALL RIGHT RESERVED

Design by LOJE Corp.

sketchbook5, 스케치북5

sketchbook5, 스케치북5

나눔글꼴 설치 안내


이 PC에는 나눔글꼴이 설치되어 있지 않습니다.

이 사이트를 나눔글꼴로 보기 위해서는
나눔글꼴을 설치해야 합니다.

설치 취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