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 독립운동사

2013.03.25 18: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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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스턴 차 사건이란?


보스턴 학살 이후 찾아온 평화와 영국 물품 수입에 대한 보이콧도 끝남에 따라 아메리카 식민지는 다시 번성하기 시작했다. 런던과의 충돌도 잠시 소강 상태에 접어들었다.

새뮤얼 애덤스와 동료들은 이 같은 평화로 저항의 분위기가 약화되는 것이 두려웠다. 그들은 매사추세츠 의회를 보스턴 밖으로 이전하는 문제와 총독 급여의 지급 주체를 거론하며 식민지인들의 가슴에 다시금 저항의 불길을 당기려했다. 그것들은 법적으로는 중요한 문제였으나 폭력으로 정부를 전복시켜야 할 정도로 중대한 문제는 아니었다.

그러다 상황은 로드아일랜드의 식민지 애국파가 항구에 정박해있던 영국 해군 선박 가스피호에 올라 배를 불태우면서 달아오르기 시작했다. 식민지인들은 밀수방지 업무를 맡고 있던 가스피호에 적대감을 가지고 있었다. 

가스피호 방화범들이 체포를 피해 다니는 동안 영국 왕실은 범인이 현지 배심원단에 의해 재판받을 수 있는 영국의 전통적 제도를 거부하고 범인들의 본국 이송을 강압적으로 요구했다. 새뮤얼 애덤스에게는 불길을 좀더 타오르게 할 수 있는 불쏘시기개 필요했다. 

이런 상황에서 차(tea)가 애덤스의 눈에 들어왔다. 1773년 영국 의회는 미국으로 가는 차 선적 사업의 독점권을 파산 직전에 이른 동인도회사에 넘겨주었다. 또 영국의회는 선별된 일부 왕당파 상인들에게 차사업을 몰아주어 식민지인들을 더욱 화나게 했다.

동인도회사와 왕당파 상인들이 차 상권을 독차지함에 따라 식민지의 일반 상인뿐 아니라 밀수꾼을 끼고 장사하는 상인들까지 파산할 지경에 이르렀기 때문이다. 

1773년 차를 실은 배 세 척이 보스턴 항에 도착했다. 새뮤얼 애덤스와 그의 강력한 동조자 존 핸콕을 비롯한 애국파는 있는 힘을 다해 차 하역을 막겠다고 선언했다. 존 해콕은 아메리카 대륙최대 갑부 중 한사람이었다. 하지만 런던이 동인도회사에 인가해준 차 선적 독점권 때문에 최대의 위기를 맞고 있던 사람이었다. 

1773년 12월 6일 밤. 보스턴의 모든 경제 계층이 다 포함된 150여 명의 남자들이 코르크 숯으로 얼굴을 새까맣게 칠하고 모호크족 인디언 같은 복장을 하고는 세 척의 배에 올라탔다. 그들은 영국 해군과 수많은 군중들이 지켜보는 앞에서 거의 3시간에 걸쳐 손도끼로 차 상자를 열고 차를 보스턴 항 앞바다에 집어던졌다. 

이 일은 보스턴 차 사건으로 신성화되었다. 다른 식민지에서도 유사한 차 사건이 터지기 시작했다. 이 일로 식민지와 영국은 더욱 강경하게 맞서게 되었다. 식민지의 애국파는 더욱 대담해졌으며 영국의 보수파 토리당원들은 더욱 보수적이 되었다. 의회는 뻣뻣하기만 했다.

국왕 조지는 수상 노스 경에게 말했다. “주사위는 던져졌소. 식민지인들은 항복을 하던지 승리를 하던지 하나를 선택해야 할 것이요”

*출처: 미국에 대해 알아야 할 모든 것, 미국사 (케네스 데이비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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